■ 이전
▶ 1910.5
미주
대한인국민회 통합
및 개칭
▶ 1910.8
경술국치
▶ 1911.1~
박용만(31)은 신한민보(대한인국민회 기관지)를 통해 무형국가론을
주장하고,
↘ 무형국가론은 한반도에 실질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것을
말함.
▶ 1917.7
상하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에는 무형국가론이 반영되어, ‘민국’
건설의 원칙을 천명함.
▶ 1918.11
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 → 파리 강화회의(1919.1~)
▶ 1919
3.1 운동
▶ 이승만(45)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시도
□
임시정부 수립
▶ 1919.3
러시아 전로한족중앙회에서 대한국민의회 수립을 선포함.
▶ 4.11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과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함.
▶ 4.23 국내에서
13도 대표자회의와 국민대회를 개최되어 한성정부를 수립함.
- 이
외 전단정부(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도 나타남.
- 4월경
국제연명 위임통치 청원 시도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알려지며 갈등이
시작됨.
▶ 상하이 임시정부는 4차 회의에서
한성정부와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고자 함.
▶ 안창호(42,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의 조정으로 상하이 임시정부가 한성정부의
전통성을 인정하며 통합을 추진함.
■ 상하이(상해) 시기
- 상하이는 외교 및 선전 활동에 유리하고,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으며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프랑스 조계 지역이
있었음.
↘ 아편전쟁(1856~)
이후, 중국에서 프랑스가 일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지역.
□ 임시정부 통합
▶ 1919.9.11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하며 임시정부가 발족함.
-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 공화제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함.
▶ 하지만,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부임하지 않고, 문창범(50, 대한국민의회)·신채호(40) 등
무장투쟁 세력이 이탈함.
▶ 1919.11
안창호의 설득으로 이동휘(47, 대한국민의회)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통합 정부의 모습을 갖춤.
-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정보 전달, 자금 조달 및 독립운동 조직
운영을 수행함.
- 1919.12
상하이에 육군사관학교, 캘리포니아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지만,
재정난으로 폐교함.
- 국내 대한독립애국단,
조선민족대동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 비밀결사조직들과 연계함.
- 만주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
- 재미한인사회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많은 재정을 후원함.
▶ 1919 말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발각됨.
▶ 1920
봉오동 전투(6월),
청산리 대첩(10월), 자유시 이동(1921), 독립운동 방향에 대한 차이 등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쇠퇴함.
- 1920.8
서간도 대한청년연합회 의용대, 한국독립군비단 등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을 조직함.
□ 위임통치 청원 사건의 영향
▶ 1921
이승만 위임통치 청원 사건으로 박은식(63), 신채호(42), 여준(60)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자,
▶ 1921.5
이승만은 미국으로 돌아감.
▶ 1923.1
국민대표회의 개최
- 임시정부 개혁을 주장한 개조파, 새로운 정부 수립을 주장한
창조파, 기존 정부를 지지한 정부옹호파의 대립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은 위축됨.
▶ 1923.5
임시의정원은 대통령 이승만(49)을 탄핵하고,
▶ 1923.7
개헌 작업을 통해 내각책임제로 개헌함.
- 1924
독립군 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 설치
□ 민족유일당 운동
시도
▶ 1926.5 안창호(49)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고,
▶ 1926.10
원세훈(40) 등 사회주의 세력과 통합하여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 결성한
뒤,
▶ 1927.3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을 이룸.
▶ 각지에서 촉성회가 조직되어,
▶ 1927.11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개최되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함.
- 1927
내각책임제(1923.7)를
국무위원제(집단지도체제)로 변경함.
□ 의열투쟁
▶ 1930.1
김구(55), 조소앙(44)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함.
▶ 1931
만보산 사건(7월), 만주 사변(9월)으로 한중 갈등이 격화되자,
▶ 1931.10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 1932
의열투쟁을 전개함. - 이봉창 의사 의거(1월),
윤봉길 의사 의거(4월)
■ 이동 시기
- 1932
이봉창(32)·윤봉길(25) 의사 의거와 1차 상하이 사변의 영향으로
▶ 1932.5 상하이 임시정부는 항주로 이동하고, 이후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으로 이동함.
□ 독립운동 세력의 연합과 재편
▶ 1932.11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시도하여 한국대일전선동맹이 결성되고,
▶ 1935.7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통합한 민족혁명당으로 통합하지만,
- 조소앙(49),
이청천(48) 등이 이탈하여 사회주의 세력만 남음.
▶ 1935.11
김구(60) 등이 한국국민당 창당
- 1937.7 중일 전쟁 발발
▶ 1937.8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6개 단체가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조직하고,
▶ 1938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함.
▶ 민족혁명당(1935.7)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한 뒤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 1938.10
조선의용대를 결성함.
▶ 1939.8
중국 국민당의 권유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7당 회의)를
개최하지만, 5개 정당만 회의를 진행하여,
▶ 1939.9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함.
▶ 1940.5
김원봉(43) 등 민족혁명당이 탈퇴하고, 민족주의 정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함.
■ 충칭(중경) 시기
-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결성하고, 연합국과
공동 대일 항전을 전개함.
▶ 1940.9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중경)에 정착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함.
▶ 1940.10
국무위원제(집단지도체제, 1927)를
주석제(1인 지도체제)로 변경함.
▶ 1941.12 일본이 미국 진주만 기습하자 이틀 뒤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함.
▶ 1942
김원봉(45)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 합작 정부가 탄생함.
▶ 1943.8
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인도와 버파(미얀마)에 공작대를 파견함.
↘ 일제의 영향으로 당시 인도에는 괴뢰정부가
버마에는 괴뢰국이 세워졌음.
▶ 1944 임시정부는
주석·부주석 체제로 전환됨.
▶ 1945
임시정부는 미국과 연계하여 독수리 작전을 추진했지만,
▶ 1945.8.15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실행되지 못함.
■ 광복, 이후
□ 환국
▶ 8.18
임시정부 선발대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지만, 일본군의 저지로
입국하지 못함.
▶ 9.3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정부 형태로 환국, 과도정권 수립
등의 정책을 발표함.
- 중국 내 한인 보호
기구(한무선교단)를 조직하고, 일본에 배속된 한인을 광복군으로
편입함.
↘ 만주군 장교인 박정희(29), 이주일(28)은
광복군에 편입되어
5.16 군사정변(1961)을 일으킴.
▶ 미국이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
- 11.23
김구(70), 김규식(65) 등 15인이 김포에 도착
- 12.1
조소앙(59), 홍진 등이 군산에 도착
▶ 임시정부는
조직망 확대와 국민적 기반 확보를 위해 정치공작대를 조직함.
□
신탁통치 반대운동
▶ 12.8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의 소식을 듣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함.
▶ 12.31
포고문을 발표하고 사실상 정부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지만,
▶ 미군정이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견제하여 정부로서 활동하지 못함.
□
정치 세력 분열
▶ 1946.2
임시정부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비상국민회의 조직하지만,
- 최고정무위원회가 이승만과 결탁하여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미군정 자문기관)으로 개편함.
▶ 이에
김원봉(49)·장진상·김성숙 등이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은 분리됨.
▶ 1947.2
국민회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를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함.
▶ 1947.3
국민의회는 과도정권을 수립하여 이승만과 김구를 주석·부주석으로
추대하고,
▶ 1947.9
대한국민회로 개편하지만, 이승만이 주석직을 거부하며 역할을 못 함.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분단
▶ 1947.10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UN은 한반도 총선거를 제의함.
- 이승만(73)과
한국민주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김구(72)와 김규식(67)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함.
▶ 1948.2
UN 위원단은 남한 총선거를 결정하지만,
▶ 1948.4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협상을 추진하여
통일된 민주 정부 수립에 합의하지만, 실현되지 않음.
▶ 1948.5 남한 총선거
▶ 1948.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