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청산리 대첩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함.

■ 이전
 ▶ 1905 을사늑약
 ▶ 1906 이상설(36)은 북간도에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함.
 ▶ 1907 하지만,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후 서전서숙은 폐교됨.
 ▶ 1908 서전서숙을 계승한 명동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을 이어감.

 ▶ 1910 경술국치 전후로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 1910년대 북간도는 여러 민족학교가 설립되어 독립운동 기지로 자리 잡음.

 ▶ 1919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 투쟁 단체로 전환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함.
 ▶ 1919 말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등 무장 투쟁 단체는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국경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 1920.6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둠.

 ▶ 1920.10 독립군의 공세가 이어지자, 일본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정규군을 간도로 출병시켜 
 ▶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펼치며 독립군을 추격하고, 한인을 탄압함.

■ 청산리 대첩
 ▶ 10.10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는 일본군과 교전을 피하려 했으나,
 - 일본군이 청산리 방향으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자 전투태세로 전환함.
 ▶ 10.12~13 청산리 부근에서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을 포함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편성됨.
 ↘ 대한국민군, 훈춘국민회, 대한광복단, 대한의민단, 신민단 등
 ▶ 10.13~ 독립군 지도부는 홍범도의 지휘 아래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일본군 숙영지를 불태우고 정찰망을 구축함.

 ▶ 10.21~26 김좌진이 지휘한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독립군 연합부대는 10여 차례 전투에 승리함. 
 -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쉬구, 천보산 등

 ▶ 청산리 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켜 수천 명이 희생됨.

■ 이후
 ▶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뒤,
 ▶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소비에트 정권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며 자유시로 이동함. 
 ▶ 1921.6 하지만, 자유대대와 사할린 부대 간의 갈등으로 자유시 사변이 발생함.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청산리 대첩]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