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18.1
미 대통령 윌슨이 의회에 민족자결주의 등 14개 조 원칙 제기
▶ 1918.11
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
▶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어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함.
▶ 1919.1.18~ 파리 강화회의
▶ 1919.1.21
고종(68)
승하 -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독살설이 제기되며 반일 감정이
고조됨.
▶ 1919 도쿄에서
2.8 독립선언
▶ 1919.2 김규식(39)은 파리로 출국하기 전 당원들에게 독립 시위를
주문함.
- 해외에선 자신이 누군지 모르므로, 국내에서
사건이 발생해야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함.
▶ 천도교
대표 손병희(59) 주도로 기독교, 불교계 등이 합류하여 시위 계획과
장소를 결정함.
- 최남선(30)의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이광수(28)가 교정, 한용운(41)이 공약 3장을 덧붙임.
▶ 2.28
모임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함.
↘ 현재,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터
■ 기미독립선언
▶ 3.1 오후 3시경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이 태화관에 모여,
-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일본 식민 통치를 거부하며 평화적
독립운동을 결의함.
▶ 오후 4시
총독부에 독립선언 사실을 알린 뒤, 경찰에 연행됨.
▶ 저녁 무렵
민족 대표 4인이 경찰에 자진 출두함.
■ 3.1 운동
▶ 3.1 오후 2시경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 대표를 기다리다,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 곧이어 수십만 군중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대문과 대한문(덕수궁 정문)으로 행진하고,
▶ 다시
서울을 8개 구로 나누어 행진 → 일군이 무력을
행사했지만, 시위는 계속 이어짐.
▶ 오후 6시
종로에 모여 자진 해산함.
▶ 3.2
조선총독부에서
독립단을 수색하여 1만여 명을 체포함.
- 3개월
동안 50~200만여 명이 참여했으며, 총 1,542회 진행되어 2만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함.
▶ 1919.4~12
박중양(48) 등은 전국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 해산 활동을
함.
▶ 1919.4
제암리 학살 사건
▶ 만세운동은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전국으로
확산하고,
▶ 만주, 연해주, 미국 필라델피아, 일본 등
국외에서도 일어남.
■ 국내외 영향
- 국내 미국인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고, 뉴욕타임스와 AP통신 등 해외 언론에 보도됨.
- 이를
계기로 연해주, 한성, 상하이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남.
- 일제는 보통 경찰제
도입과 친일 관료 양성, 교육제도 변경 등을 통해 문화통치를 시작함.
■ 이후
▶ 1946.3
27회 기념식을 통해 국가 경축일로 지정됨.
▶ 1948.7 제헌 헌법 공포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명기함.
▶ 1949.10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국경일로 지정됨.
▶ 1987.10
개정된 현행 헌법전문
-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밝힘.
- 🗒️대한민국헌법 2025.2.3
▶ 1989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
-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라고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