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한인이 간도
이주
▶ 19C 중후반 서북지방 대흉년으로 조선인들이
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 1910
경술국치 전후 한인들의
간도 이주는 증가함.
▶ 간도는 지리적 이점과 한인
사회의 지원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교육과 독립군 기지
설립이 이루어짐.
↘ 1918년 북간도 인구의 약 75~80%가 한인으로
구성됨
□ 무장 독립 단체
▶ 1919
3.1 운동
▶ 간도 한인 사회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며 여러 독립군 단체가
조직·재정비되어,
▶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면서 일본군과의
무력충돌이 빈번해짐.
□ 일본군의 학살과 봉오동 전투
- 1920.1
러시아 내전(1917)
중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은 내전 종료 후에도 철군하지 않음.
▶ 1920.4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지도자들을 포함한 70여
명을 학살함(4월 참변).
▶ 1920.5~8
서간도에서도 일본군이 한인을 학살하며 학교와 교회를 파괴함.
▶ 1920.6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함.
▶ 간도 지역 독립군 섬멸에 실패한 일본군은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는 계획을 세움.
■ 간도참변
▶ 1920.10 일본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간도 출병을 개시하고,
▶ 10월 중순
2만여 일본군이 간도로 진입한 뒤 점령 지역을 확대하며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개시함.
▶ 1920.10~12 일본군은 간도 한인 마을을 습격·방화하며 민간인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무차별 학살함.
-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초토화하고 33명을
학살한 사건(장암동 학살)이, 캐나다와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세계에
알려짐.
▶ 1920.10
독립군이 간도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며,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함.
▶ ~1921.5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간도 지역 한인 학살이 끝남.
□ 피해
규모
- 무장한 일본 정규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학살하고 강간, 방화, 생매장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지름.
-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0년 10~11월 두
달간 3,500여 명의 한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했지만,
- 학살이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