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19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활발해짐.
□ 1920년대 독립운동의 위기
- 파리 강화회의(1919.1~)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독립 청원 시도는 좌절됨.
-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1920) 등을 펼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함.
- 해외 무장 독립운동은
간도 참변(1920),
자유시 사변(1921) 등으로 전력이 약화됨.
- 미주
지역의
대한인 국민회는
하와이와 북미 간의 갈등으로 분열됨.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사건,
국민대표회의(1923) 등으로 활동이 위축됨.
□
순종 승하
▶ 1926.4 순종이
승하하자,
▶ 일제는 3.1 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경계
태세를 갖추고 군·함대를 배치하며 감시를 강화함.
▶ 사회주의자(노총계), 전문학교 학생(사직동계), 중등학교
학생(통동계) 등이 만세운동을 준비함.
- 사회주의자의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됨.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전문학생들이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함.
- 중등학교
학생들은 격문을 작성하고 실제 만세운동을 주도함.
■ 6.10 만세운동
-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거사함.
- 24,000여 명의 학생들이 순종의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격문을
뿌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임.
▶ 오전 8:30 종로
3가에서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
▶ 오전 8:45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교 학생 50여 명이 시위에 참여
▶ 오전 9:30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시위에 참여
▶ 오후
훈련원, 동대문, 신설동, 동묘 등지에서 시위가 지속됨.
▶ 일제의
탄압으로 진압됨.
▶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며 각 지역 학생의 동맹 휴학 등으로 확산됨.
▶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이 체포됨.
■ 이후
▶ 1926.6
출판법위반 등으로 11명이 기소되어
▶ 1927.3
결국 10명은 복역하게 됨.
▶ 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