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파리 강화회의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제시되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독립 청원을 시도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로 좌절됨.

■ 1차 세계대전
 ▶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7 연합국으로부터 산둥반도와 뉴기니 등의 이권을 약속받은 일본은 지중해에 해군을 파견함.
 ↘ 영국과 일본은 1902년부터 동맹을 맺음.
 ▶ 1917.4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참전을 결정

 ▶ 1917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의 ’평화에 대한 포고‘
 - 제국주의 체제와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이 필수적이며,
 - 식민지 민족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직접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 

 ▶ 1918.1 윌슨의 ’14개 조 원칙‘
 - 제국주의 국가 주도의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계 질서를 구축해야 함을 주장하며, 
 - 국제 연맹 결성, 비밀외교 폐지, 전후 배상 원칙, 민족자결주의 등 제국 간 타협과 양보를 제안함.

 ▶ 1918.11 연합국과 독일의 정전협정으로 전투가 종료됨.

 ▶ 1918.11 미국은 중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고자, 중국에 크레인 특사를 파견함.
 - 크레인이 파리 강화회의가 약소민족에 절호의 기회라는 발언을 하자,
 - 여운형(33)은 크레인을 만나 파리 강화 회의 참석을 결정하고,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함.
 - 초기, 한국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가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된다고 보아 파리강화회의에 회의적이었지만,
 - 민족자결주의가 국제질서의 원리로 제시된 점을 주목하며 독립운동의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남. 

■ 파리 강화회의
 - 1919.1~6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승전국이 ’14개 조 원칙‘으로 전후 처리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협의
 ▶ 1919.2 신한청년단 김규식(39)이 파리로 출발
 - 러시아 연해주, 미주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시도하지만,
 -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 속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독립 청원 시도는 좌절됨. 

 - ~1920 승전국과 패전국 간 조약 체결
 ▶ 1919.6 베르사유 조약 - 국제연맹 조직, 독일 제재
 ▶ 1919.9 생제르맹 조약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 1919.11 뇌이 조약 - 불가리아 제재
 ▶ 1920.6 트리아농 조약 - 헝가리 제재
 ▶ 1920.8 세브르 조약 - 오스만 제국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