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10
경술국치 이후,
신규식·김규식·신채호·박은식 등이 상하이로 망명함.
↘ 당시 상하이는 열강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있어
여론 형성, 정보 수집, 외교 활동에 유리했음.
▶ 1911
신해혁명 → 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됨.
▶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
▶ 1912.7
신규식(33)과 박은식(54) 등을 중심으로 동제사가 조직됨.
▶ 1910년대 중반 이후
선우혁·여운형·장덕수 등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
연루자와 유학생들이 상하이로 이동함.
▶ 1917
2차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됨.
▶ 1918.1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등 14개 조 원칙 제기
▶ 1918 여름 이후
동제사 청년층이 정기적 모임을 형성함.
▶ 1918.11 1차 세계대전 정전협정
- 일제가 승전국으로 국제사회에 위치하자,
한국인들은 외교를 통한 독립 추구를 논의함.
■ 신한청년당
▶ 1918.11 중순 미
대통령 특사인 크레인이 상하이에서 민족자결주의 등 14개조가
약소민족에게 기회임을 선전함.
▶ 여운형(38)은
크레인을 만나 원조를 요청하고, 동제사 청년층 모임을 기반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함.
▶ 신한청년단 대표 명의로 ‘한국 독립에 관한 진성서’를
작성하여,
▶ 한 통은 크레인을 통해 미 대통령에게 보내고, 다른
한 통은 인편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냈으나 도난당함.
- 진정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아시아 지배와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며, 한국 병합이 세계적 불행임을 지적함. 그는 조선
독립과 아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의 지원을 호소함.
□ 첫
활동
▶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파견을 결정하고,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선발함.
▶ 1919.2
김규식(39)은 상하이에서 파리로 출발하고,
- 신한청년당에서는
김규식의 경비를 후원할 국내외 독립운동 전개를 촉구함.
▶ 파리
강화회의 참석 소식은 국내외에 전해져
2.8 독립선언과
3.1 운동 추진에 영향을
미침.
▶ 하지만, 파리 강화회의에서 소득은 없었음.
□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 1919 3.1 운동
▶ 신한청년당은 상하이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 1919.4
이를 기반으로 신익희(28), 김구(44) 등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를 조직함.
▶ 1919.5
안창호(42)가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체계화하고,
-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외교 활동을, 나머지 당원들은
임시정부에서 실무를 담당함.
▶ 1919.9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
□ 활동
▶ 1920.2
신한청년당 제1회 정기총회에서 강령을 채택함.
대한 독립을 이루고, 낡은 제도를 없애서 사회를 새롭게 바꾼 뒤, 학문과
산업을 발전시켜 한민족의 문화를 인류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
▶ 1921.11
신한청년단은 워싱턴 평화회의도 참석하지만, 소득은 없었음.
▶ 1922.1
원동(동아시아, 극동 지역) 민족근로자대회
- 소련이
피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 지원을 제안하는 자리에 여운형(41)과
김규식(41)이 참여함.
-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 내부
개조와 소련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짐.
▶ 1923.1~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
- 임시정부 해체 후 새 정부를 조직하자는
창조파와 기존 임시정부를 개편·보완하자는 개조파(신한청년당 등)가
대립함.
▶ 1923 말
신한청년당 해체
-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흥사단(1913)으로 이탈하며 세력이
약화하고,
- 여운형이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입하여
김구, 장봉 등 탈당하며 내부 갈등이 심화함.
■ 이후
▶ 1925
박은식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 부활이 시도되었으나,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진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