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3.1 한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자치회와 친목회를
결성
- 1903.8~1907.9
신민회, 동회 등 24개 단체가 조직됨.
▶ 1903.9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친목회를 결성
▶ 1905.4
하와이 한인들의 북미 이주 증가에 따라 안창호는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 북미 지역(서해안 일대)에 공립협회를 포함
4개의 단체가 형성됨.
▶ 1905.11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민자들은 사실상 망국민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함.
▶ 1907.7
정미7조약으로 미주
단체들의 통합 여론이 형성됨.
- 1907.9
하와이 단체들이 통합하여 한일합성협회를 창립하고,
- 1908
북미 지역에서 박용만의 제의와 스티븐슨 처단 사건이 통합의 계기로
작용하여,
▶ 1908.10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는 통합을
선언함.
▶ 1909.2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는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고,
▶ 1910.2
북미 지역 대동보국회와 동맹신흥회가 통합하여 활동하다 국민회로
통합함.
- 하와이지방총회, 북미지방총회로 개편
■ 대한인 국민회
▶ 1910.5 대한국
국민회로 개칭
▶ 1910.8 경술국치
▶ 1910.10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통해
자치제도 실시와 임시정부 수립을 표방하며 국민국가 건설을 선언함.
▶ 1911
국내 신민회를 포함하여
미국, 러시아, 만주 등 5개 지역에 116개 지방회를 설립
- 국민회는
공립협회 시절부터 국내외 한인단체를 통합한 통일연합기관을
구축하고,
- 국권 회복과 공화정체 독립국 건설을
목표로 삼음.
▶ 1912.12 중앙총회 선포식을 통해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서 자치제도
실시를 선언함.
▶ 1912~1913
하와이지방총회에 박용만과 이승만이 참여하여 지도자로 부각됨.
▶ 1914.6
대조선 국민군단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씀.
▶ 1914 1차 세계대전 → 미주 지역에서만 활동이 이어지고 다른 지역은
해체·금지됨.
■ 분열
▶ 1915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박용만 계열이 당선되어 이승만 계열이 밀리자,
- 이승만은 임시대의원 회의를 개최하여 지난 선거와 모든 법안을
무효화하고 박용만 계열을 축출함.
▶ 1917 이승만이
국민회 재정을 장악하고,
▶ 1918
재정 남용 문제로 조사원들이 해명을 요구하던 중 유혈사태가 발생함.
▶ 1918.7
이승만의 계속된 축출 시도로 박용만은 지지 세력과 갈리히 연합회
결성하며,
-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됨.
▶ 1919 3.1 운동 →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1919.8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외교와 재정 모금을 담당함.
▶ 1920 초반
하와이지방총회가 중앙총회의 권한을 무시하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 1921.3
중앙총회의 관할에서 벗어나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됨.
▶ 1923.1
북미 지방총회는 대의원회를 통해 중앙총회를 폐지하고 ‘대한인 국민회
총회’로 개칭
- 하와이 한인사회와 완전 분리됨.
▶ 1920s
북미 한인사회는 대한인 국민회 총회를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 계열(하와이 대한인교민단)과 박용만
계열(1919.3 설립된 대조선독립단)로 양분됨.
■ 통합
▶ 1929.11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1933.2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은 국민회 재건 운동을 통해서 대한인 국민회를
재설립하고,
- 1934
박용만 계열의 대조선독립단도 통합됨.
▶ 1930s
북미 국민회는 각지에 공동회를 설립하고, 대표들이 모여 위원제로
변경하며 재도약을 모색함.
▶ 1937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하와이와 북미 국민회는
임시정부
지원을 강화하고,
▶ 1941.4
동지회와 연합기구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함.
▶ 1944~ 북미와 하와이 국민회는 연합위원회의 주도권을 쥐고
워싱턴사무소 개설, 연합국회의 민중대표단 파견 등 외교 활동을
전개함.
▶ 1945~
해방 이후에도 국민회는 재미 한인사회의 구심체로 존속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