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10.12~ 회사령 시행으로 조선인
기업 설립이 제한되고, 민족 자본의 성장이 억제됨.
▶ 1920.4~
회사령 폐지 후 일본
기업들이 한반도에 대거 진출하며 경제적 침탈이 심화함.
■ 물산장려운동
▶ 1920.8 평양에서
조만식 등 70여 명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됨.
- '자급자작'을 실천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적 자립과 사회
발전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함.
↘ 자신이 필요한 물품이나 재화를 직접 생산하여
소비하는 것
▶ 1922.1
동아일보에서 자급자작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주장
▶ 1922.4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조선인의 산업 발달 기본권을 선언하고,
- 산업
기술 습득, 조합 조직 강화, 조선산 제품과 상점 이용을 실천 방안으로
의결함.
▶ 1922.6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 1922.10 조선총독부와
대장성이 관세 철폐를 합의하자(1923년 4월 시행), 각 신문·잡지에서
자급자작 운동을 호소하며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함.
↘ 대장성은 경제·재정을 담당했던 정부 기관으로,
현재의 재무성에 해당
▶ 1922.12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 표어를 발표하며 운동 분위기를 확산시킴.
↘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
▶ 1922.12 자작회가
조직되어 조선산 제품 소비와 생산을 촉진하고, 토지를 지켜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 함.
▶ 1923.1
서울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 직물 부문이 호황을 맞았지만 생산 부족으로 가격이 상승했고,
상인들은 이득을 보았으나 소비자 부담이 증가함.
- 이에 물산장려회가 소비조합 결성을 시도했지만
실패함.
■ 쇠퇴
▶ 1923 여름 이후
열기가 시들해짐.
- 물산장려운동은 자본과 기술
부족, 일본 자본과의 경쟁력 약화, 조직력 취약 등의 이유로 침체함.
□
찬성 입장
▶ 나공민 등 지식인들은 물산장려운동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족적 단결을 이루며,
- 무산자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 운동임을 주장함.
□ 반대
입장
▶ 주종건, 이성태 등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이 중산계급과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 노동자·농민에게
실질적인 혜택 없이 계급의식을 약화시키고 경제적 부담만 초래한다고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