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경학사
▶ 1910
😈경술국치
▶ 1911.4
이회영(45) 등
신민회 인사들은 서간도(백두산 북서쪽)에 경학사 설립하고,
▶ 1911.6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치함.
- 경학사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자치·교육을 통한 민족 자립을 지향함.
▶ 1913.3
자금 모집과 일제의 압박으로 경학사 활동은 중단됨.
□
부민단과 한족회
▶ 1915 가을~1916 초
서간도 자치기관인 부민단이 조직됨.
- 1919 3.1 운동
▶ 1919.3 부민단 등 서간도 단체들이 모여 한족회로 단합하고, 한족회는
군정부를 조직함.
▶ 1919.5
무관학교를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함.
▶ 1919.6~1920.1
한족회는 기관지인 ‘한족신보’ 발행했지만 폐간되고, 다시 ‘새배달’
간행
- 1919 여름
파리 강화회의에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전쟁론을 주장함.
■ 서로군정서
▶ 1919.9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
▶ 1919.11 한족회와
군정부는 임시정부의 통합 제안을 받아들여 임시정부 통치하에
들어감.
▶ 1920.3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변경하고, 무장 독립 투쟁을
담당함.
- ~1922
한족회와 국내에서 모은 군자금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 국내·서간도
지역에서 보민회, 일본거류민단 등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고 일제 관공서
파괴 등을 수행함.
-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북로군정서와 협조하여
활동함.
□ 간도참변과 청산리대첩
▶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세우고,
- 일제는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만주에 2만여 명의 정규군을 투입함.
▶ 1920.10~11
간도참변으로 일군은
최소 3,000여 명의 만주 지방 한인들을 학살함.
▶ 1920.10.21~26
🏹청산리 대첩
□ 자유시 사변
▶ 서로군정서의 지청천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함.
▶ 1920.12
독립군 단체들은 일군에 대항하고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러시아령으로 이동함.
▶ 1921.6
자유시 사변 - 러시아 적군의 공격으로 독립군은 희생당하고 무장
해제됨.
■ 이후
▶ 1922 서간도에 주둔하던 서로군정서 등 독립군 단체들은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를 결성함.
↘ 대한독립단·보합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
▶ 1922.8
대한통군부는 통의부로 개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