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출생
▶ 981
제5대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는 궁을 나와 사저에서 지내게 됨.
▶ 992년
헌정왕후는 왕욱과의 사이에서 왕순(현종)을 낳았고, 왕욱은 이 일로
유배되었음.
↘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이며, 헌정왕후는 왕순을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남.
▶ 제6대 성종은 왕순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한 뒤, 이후 왕욱에게 보내 함께 살게
하였음.
- 994
한편,
1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은 화의를 맺고 공식 관계를 이어 갔음.
□ 천추태후의 견제와 왕순의 후계자 부상
▶ 996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세상을 떠난 뒤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 997
제7대 목종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견제를 받게 됨.
▶ 천추태후는 왕순을 강제로
출가시켜 숭교사에 머물게 했고, 1006 이후 신혈사로 옮겨진 왕순을 여러 차례 해치려
하였음.
- 1004 한편,
거란은 전연의 맹을 통해 송으로부터 매년 세폐를 받는 유리한 국제
질서를 형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에 대해서도 더욱 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음.
▶ 1009
그러던 중 목종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후계 문제가 떠오름.
-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그를 궁으로 불러들이며
강조에게 호위를 맡기려 하였음.
■ 즉위 이후
□ 강조의 정변과 현종의 즉위
▶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이미 목종을 해쳤다는
잘못된 보고를 믿고, 김치양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음.
▶ 강조는 뒤늦게 목종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군사를 움직인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해 개경을 장악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폐위하였음.
▶ 1009년 이후 강조는 왕순을 개경으로 모셔 와 현종으로 즉위시키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했으며, 목종은 유배 도중 시해하였음.
▶ 1010.2
성종 대에 중단된 연등회를 부활시켰고,
1010.11 팔관회를 다시 엶.
□ 2차 고려-거란 전쟁
- 고려와 여진 사이의 마찰이 거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강조의 정변도 알려졌고,
▶ 1010년
거란 성종은 이를 빌미로 삼아
고려를 침입함.
▶ 강조가 거란군에 맞서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사로잡히면서 고려군은 크게 무너졌음.
▶ 이에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피난 과정에서 지방 세력의 위협과 혼란을
겪었음.
↘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 조성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짐.
▶ 이후 현종은 자신의 친조를 조건으로 거란에 화친을
청했고, 거란 성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철군하였음.
↘ 친조는 한 나라의 왕이 직접 다른 나라의 황제나
군주를 찾아가 예를 올리는 일
□ 전후 복구와 통치 체제 정비
-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뒤 전쟁으로 불탄
궁궐을 다시 짓게 하였고,
- 1010~1029 개경의 방어가 취약하다는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성
축조를 추진하였음.
▶ 1012 또한 장인의
수를 줄이고 이들이 농사를 짓게 하여,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와
농업 생산을 회복하려 하였음.
▶ 1012
현종은 12목의 절도사를 없애고 대신 5도호와 70도 안무사를 두었으며,
1018 이후 안무사를 폐지하고 지방
제도를 4도호 8목으로 다시 재편하였음.
▶ 1013
이어 거란과의 전쟁으로 소실된 실록을 다시 편찬하게 하였음.
↘ ‘7대 실록(실대사적기)’라 불렸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음.
▶ 1018 향리
정원제를 시행하여 향리의 수와 지위를 규정하였고,
- ?
또한 사심관 선발 기준을 강화하여 특정 가문이 지방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였음.
□ 3차 고려-거란 전쟁
- 현종은 병환을 이유로 강화 조건이었던 친조를
이행하지 않았음.
- 이에 거란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가 거부하자, 몇 해 동안 국지전이 이어졌음.
▶ 1018.12
결국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대군을 보내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음.
▶ 전쟁이 시작되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군에게 계속 피해를 줬고, 현종도 적이 개경 인근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물러나지 않고 농성전을 준비하였음.
▶ 1019년 2월 결국 고려군은 귀주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거란군을 크게
격퇴하였고, 이후 현종이 화친을 요청하자 거란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오랜 전쟁은 끝나게 됨.
□ 민생 안정과 제도 정비
▶ 1018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크게 창건하였음.
▶ 1024
또한 지역 규모에 따라
과거에 응시할 향공의
수를 정하고,
- 예부시 전에
국자감에서 미리 시험을
치르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인재 선발 과정을 정비하였음.
- 1024
이슬람 상인들이 벽란도에 도착함.
▶ 1025
현종은 공사를 줄여 백성들이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고,
▶ 1028
뽕나무 심기와 말 기르는 규정을 마련해 비단 생산과 목축을
장려하였음.
- ?
이 밖에도 토지 보유 면적에 따라 세금 제도를 조정하고, 물가가 폭등할
때 국가가 개입하도록 하였으며, 의창 제도를 정비해 백성 구제 기능을
강화하였음.
■ 사후
▶ 1031년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제9대 덕종이 즉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