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차 고려-거란 전쟁
▶ 994 고려와
거란은 1차 전쟁을 끝내고
강화를 맺었음.
- 이를 통해 거란은 고려와 송의
연결을 끊는 목적을 이루었고,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북방 영토인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얻음.
- 1004
거란은 전연의 맹을 통해 송으로부터 매년 세폐를 받는 유리한 국제
질서를 형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에 대해서도 더욱 강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음.
□ 여진족과의 갈등
- 고려가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며 여진족과
갈등을 겪는 가운데,
↘ ‘말갈’은 고구려·발해 시기에 만주 일대의 여러
부족을 가리키던 이름으로, 발해 멸망 이후 이들 계통의 세력은 점차
‘여진’으로 불리게 되었음.
▶ 고려 관리가 동여진 부락을 공격하고, 고려에
조공하러 온 여진인을 죽이면서 여진족의 원한을 사게 됨.
▶ 이에 여진족은 거란에 호소했고, 그 과정에서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시해했다는 소식도 거란에 전해졌음.
▶ 거란이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자 고려는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어보려 했지만 실패하였음.
■ 2차 고려-거란 전쟁
▶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입하였음.
▶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 등이 성을 지키며
거란 성종의 회유를 거부했고,
▶ 이에 거란 성종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인주 남쪽에 주둔시킨 뒤, 남은 군사를 이끌고
통주로 내려갔음.
□ 통주전투 패배와 거란의 진격
▶ 강조는 병력 30만을 동원해 거란군에 맞섰고
초반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심한 틈을 타 거란군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혔음.
- 이에 따라 고려군 주력 병력이
무너졌고, 서북면 방어선은 고립되었음.
▶ 통주성과
서경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거란군의 개경 진격을 막지는 못했고,
▶ 결국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하였음.
□ 양규의 유격전과 포로 구출
▶ 1010.12 양규는
흥화진에서 병사를 이끌고 나와 통주 병력과 합류한 뒤, 밤에 곽주를
기습해 거란군에게 승리를 거뒀음.
▶ 이후 김숙흥 등과
함께 여러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거란군에게 피해를 주었음.
□ 거란의 철군과 고려군의 반격
▶ 1011년 1월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자
▶ 피난 중이던 현종은 자신의 친조를 조건으로 거란에 화친을
청하였고, 거란군은 후방에서 이어진 고려군의 공격과 보급 부담
속에서 이를 받아들여 철군하였음.
↘ 친조는 현종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는 것을 의미
- 양규는 서북면에서 계속 전투를 이어가며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3만여 명을 구출하였지만,
- 1011.1
애전 전투에서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대에 포위되어 종일 싸우다가
전사하였음.
- 양규와 김숙흥 등의 활약으로 고려군은 철군하는 거란군을 계속
공격해 큰 피해를 줬고, 항복했던 여러 성도 되찾았음.
↘ 전쟁이 끝난 뒤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가족과 후손에게도 포상하여, 두 사람을 고려의 공신으로
기렸음.
■ 이후
▶ 현종이
거란에 친조하지 않자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음.
▶ 1018.12
거란은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고,
▶ 1019
고려는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치며 승리를 거두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