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차 고려-거란 전쟁
▶ 993년 겨울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으나,
서희의 협상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음.
- 고려는
거란과 외교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였고, 이후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며 북방 방어 거점을 마련하였음.
□ 전연의 맹
▶ 979 송은 중국
대부분을 통일한 뒤 거란을 공격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 1004
오히려 전연의 맹을 맺어 매년 거란에 세폐를 보내게 되었음.
- 거란은
송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한 뒤, 고려에 대해서도 더 강한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음.
□ 강조의 정변과 2차 고려-거란 전쟁
▶ 1009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폐위·시해되었고,
이 소식은 고려와 갈등을 겪던 여진족을 통해 거란에 전해졌음.
▶ 1010년 겨울
거란 성종은 이를 ‘대역’으로 규정하고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음.
▶ 강조의 패배 이후 서경과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한 뒤, 친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였고
▶ 거란군은 이를 받아들여 철군했지만, 양규
등 고려 장수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음.
■ 3차 고려-거란 전쟁
▶ 그러나 현종이 병을 이유로 친조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음.
▶ 고려가 이를 거부하면서, 압록강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국지전이 벌어졌음.
□ 거란의 진격
▶ 1018년 12월 거란이 소배압을 앞세워 다시 고려를 침공하자,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음.
▶ 강감찬은 흥화진 근처 삼교천에서 거란군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음.
▶ 이어 강민첨은
내구산에서 소배압의 부대를 격파했고,
▶ 조원도
마탄에서 승리를 거두었음.
▶ 그럼에도 거란군이 계속
개경으로 진군하자, 강감찬은 김종현 등의 군사를 이동시켜 개경 방어를
강화하였음.
□ 개경 앞에서 멈춘 거란군
▶ 1019.1 소배압은 고려군의 계속된 요격에도 개경에서 백 리(약 40㎞)
떨어진 신은현까지 진격하였음.
↘ 말이 빠르게 달리면 시속 40~50㎞ 안팎까지 낼 수
있어, 기병에게는 수도를 압박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
▶ 이에 현종은 백성들을 성 안으로 들이며, 청야
작전으로 거란군에 맞섰음.
↘ 청야 작전은 적이 먹을 식량이나 쓸 물자를 얻지
못하도록, 들판의 곡식 등을 미리 없애는 방어 전략
▶ 소배압은 철군을 알리는 한편 몰래 기병을 보내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고려군의 야습을 받아 전멸하였음.
▶ 결국,
개경 공격에 실패한 거란군은 연주와 위주 방면으로 이동했으나,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다시 패하면서 철군을 결정하였음.
□ 귀주대첩
▶ 1019년 2월 철군하던 거란군은 귀주 동쪽 교외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마주쳤음.
↘ 귀주는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좁은 계곡길이 이어져 있어 적을 막기에 유리한
지형임.
▶ 전투가 치열하게 이어지던 중 김종현의 원군이
도착했고, 비바람의 방향이 남풍으로 바뀌어 거란군을 향해 몰아치며
고려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음.
▶ 이에 고려군은
총공세를 펼쳐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음.
■ 영향
- 고려는 거란의 대규모 침입을 막아내며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고, 송과 여진 세력들도 고려와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음.
- 이후 고려와 거란은 화친 관계를 맺었으며, 귀주대첩 이후
거란이 다시 고려를 대규모로 침공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