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국자감

국학
992년

유교적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국가 교육 기관으로,
무신정변과 원 간섭기를 거치며 위축되었으나, 공민왕 대에 성리학 교육의 중심으로 다시 자리 잡음.

국자감

■ 이전
 ▶ 930 고려 태조는 서경에 학교를 세워 서업(서예)과 의업(의학), 복업(천문학)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 936 이후 후삼국을 통일하였음.

 - 고려 초에는 신라 국학을 계승한 교육 기관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국자감이 설치되기 이전에도 문한 기관 등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였음.
 ↘ 문한 기관은 나라의 공식 문서와 글을 작성하던 관청

■ 국자감 설치
 - 958 제4대 광종과거제를 시행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려 하였고,
 ▶ 992년 이러한 흐름은 제6대 성종의 국자감 설치로 이어져 국가 교육 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었음. 
 - 국자감은 유학 중심의 관료 교육 기관으로, 율학(율령)·서학(서예)·산학(수학) 등도 함께 교육하였음.
 - 이러한 국자감은 관리가 되려는 계층을 위한 기관으로, 입학 대상은 대체로 지방 유력층 자제였으나 지방관의 추천을 받은 재능 있는 인물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음.

□ 국자감시 운영
 - 국자감생을 대상으로 예부시 이전의 예비 고시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 고려의 과거제는 예비시험을 거쳐 예부시(최종시험)에 응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음.
 ▶ 1031 제9대 덕종 때, 이 시험은 ‘국자감시’라는 명칭을 부여받음.
 ▶ 1036.7 제10대 정종은 국자감생이 3년간 수학한 뒤 응시할 수 있게 하였음.

□ 국학의 부진과 정비 시도
 ▶ 제11대 문종(1046>)은 최충 등의 사학 12도가 흥성하면서 국학이 부진해지자, 
 ▶ 1063 학관에게 교육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고 장기 재학에도 성과가 없는 학생은 퇴출하도록 하였음.

 ▶ 제16대 예종(1105>)은 7재를 설치하고 청연각·보문각을 세우는 한편, 국학 운영과 학생들의 장학 기금 마련을 위해 양현고(1119)를 설치하는 등 관학 진흥책을 추진하였음.
 ▶ 제17대 인종(1122>)은 국자감의 학식을 제정하여 입학 자격과 정원, 교육 내용, 교과 과정을 정비하였음.

■ 고려 후기의 국자감
 ▶ 1170 무신정변으로 무신 집권기가 시작되면서 국자감은 중시되지 못함.

□ 원 간섭기의 국자감
 ▶ 1275> 원 간섭기에는 국자감의 명칭이 국학으로 바뀜.
 ▶ 1280 제25대 충렬왕은 경학과 역사서에 밝은 교수를 두어 교육 정상화를 추진하였고,
 ▶ 1298 제26대 충선왕은 즉위 후 이를 성균감으로 고쳤음.
 ▶ 1302 그러나 충렬왕 복위(1298>) 후 실시한 시험에서 교육 수준이 아직 회복되지 못했음이 드러났으며,
 ▶ 이에 안향의 건의로 중국 서적을 들여오고 대성전을 세워 학문 진흥 분위기를 다시 조성하였음.
 ▶ 1308 이후 충선왕이 복위하며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함.

□ 성균관 재건과 성리학 확산
 ▶ 1352 제31대 공민왕은 유명무실해진 국학을 재건하고 생도를 양성하도록 하였으나, 정치 혼란과 홍건적·왜구의 침략으로 성과는 제한되었음.
 ▶ 1356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추진하며 명칭을 국자감으로 되돌린 뒤
 ▶ 1362 다시 성균관으로 바꾸었고,
 ▶ 1367년 성균관을 중건해 정원을 100명으로 늘리는 한편 이색·정몽주 등을 학관으로 임명하여 성리학 교육을 강화하였음. 
 ↘ 이 시기부터 성균관은 율학·서학·산학 등의 기술 교육을 배제하고, 오직 순수 유교(성리학)만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뀐 것으로 보임.

 ▶ 이후 성균관을 기반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학문·정치 이념으로 확산시켰고, 그 흐름이 조선 체제의 사상적·인적 기반이 되었음.




# 참고 자료
[국자감] 교과서 용어 해설, 우리역사넷 2024.10.5
[국자감]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6.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