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 신라 말기
□ 배경
▶ 8C 중반 신라
진골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중앙의 통치력이 점차 약화했고,
▶ 9C 후반
극심한 수탈에 따른 백성들의 봉기가 잇따르며 궁예, 견훤 등 지방 호족
세력이 성장함.
▶ 877
송악 지역의 유력한 호족 왕륭(용건)의 아들로 태어난 왕건은
▶ 896
아버지와 함께 궁예에게 합류하여 발어참성의 성주가 되었고,
▶ 898
송악을 새 도읍으로 삼은 궁예 세력은 이를 발판 삼아 계속해서 세력을
넓혀나갔음.
□ 후삼국의 시작과 왕건의 등장
▶ 900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무렵,
궁예의 중용을 받은 왕건은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일대를
성공적으로 공략했음.
▶ 901
곧이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한반도는 본격적인 후삼국 시대로 접어듦.
▶ 903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배후인 금성군(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을 점령하는 큰 전과를 올렸음.
▶ 이후에도
최전방에서 후백제와 전투를 거듭했고,
▶ 913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국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 오름.
■ 고려 건국
-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폭정을
일삼자,
▶ 918년 6월 지지 세력의 추대를 받은 왕건은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름.
- 즉위 직후 왕건은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을
설치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풀어주었으며, 세금을 10분의 1로
대폭 감면하는 등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음.
□ 견훤과의 대립
▶ 920 후백제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신라를 둘러싼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적 대립이 본격화 됨.
▶ 925
이후 조물성에서 왕건과 견훤이 직접 맞붙었지만 끝내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측은 인질 교환을 조건으로 다시 화친을 맺었음.
▶ 926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사위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견훤은 이를 고려의 고의적인 소행으로 의심했고, 그 결과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음.
□ 후백제의 서라벌 함락과 공산 전투
▶ 927 견훤은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서라벌을 함락한 뒤 경순왕을 옹립함.
▶ 뒤늦게
도착한 왕건은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을 비롯한 여러 맹장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참패하였음.
▶ 이후 고려는 후백제의
맹공 속에서 극심한 수세에 몰림.
□ 고창 전투 이후 후삼국의 주도권 장악
- 왕건은 그동안 꾸준히 추진해 온 유화책을
바탕으로 현지 호족들의 결정적인 협력을 이끌어 냈고,
▶ 930년 1월 그 결과 고창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전세를 고려 쪽으로
완전히 뒤집음.
▶ 930.2 이후
경상도 북부와 동해안 일대의 호족들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하였음.
- 930
서경(지금의 평양)에 행차해 학교 창립을 지시함.
- 934
또한 발해가 멸망(926)한 뒤,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호의 유민을 이끌고 망명하자 고려 태조 왕건은 왕씨 성과 관직을
하사하였음.
▶ 935.6
한편, 권력 승계 갈등으로 아들 신검에게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 935.11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평화적으로 항복하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은 급격히 고려로 기움.
- 이때,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으며 사심관 제도가 시작되었음.
↘ 사심관은 고려가 지방 통제를 위해 지방 출신
유력자에게 향리층 감독을 맡긴 제도
□ 일리천 전투와 후삼국 통일
▶ 936.6 왕건은
아들 왕무를 선봉으로 세워 마지막 남은 후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군대를 출병시켰고,
▶ 936년 9월
왕건이 직접 이끄는 본진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도읍
완산주까지 점령하며,
▶ 마침내 40여 년에 걸친 후삼국의 쟁패를 끝내고 진정한 통일을
완성함.
□ 왕건의 정책
-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옛 삼국과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민족 통합을
이루었음.
- 또한, 정치적 유대를 강화하는 혼인
정책과 왕실과의 결속을 높이는 사성 정책으로 호족을 회유하고,
- 호족의
자제를 수도 개경에 머물게 하여 지방 세력을 통제하는 기인제도로
호족을 견제하였으며,
- 불교(연등회·팔관회)를
장려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유학자를 등용하여 통치의 기반을
다졌음.
■ 후삼국 통일 이후
▶ 940 왕건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관료와 군사들에게 인품과 공로를
기준으로 역분전을 지급하였음.
- 이후, 이를
대신해 관직을 기준으로 토지를 분급하는
전시과(976 >)가 시행됨.
▶ 943년 왕건은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의 통치 방향과 왕이 지켜야 할
원칙을 후대에 당부한 훈요 10조를 유훈으로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