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19
3.1 운동 이후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가 일부 허용됨.
▶ 1920~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간 언론이 창간되며 여론 형성의 기반을
마련함.
▶ 1920.6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사회혁명당이 결성되고,
고려공산당(1921)과
조선공산당(1925)으로 이어짐.
▶ 1921
그러나,
자유시 사변으로 무장
독립 투쟁 전선은 타격을 입고,
▶ 1923.6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며 임시정부의
활동도 위축됨.
▶ 이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
연대의 필요성이 커짐.
▶ 1926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하여
6.10 만세 운동을
준비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함.
▶ 1926.10
북경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시작되어, 만주와 국내에 영향을 미침.
▶ 1926
한편, 천도교 신파는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자치운동을
계획함.
↘ 한국의 독립을 바로 이루기보다, 먼저 자치권을
얻어 독립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
■ 신간회 창립
▶ 1927.1
조선일보·흥업구락부·서북지역 기독교·천도교 구파·불교·조선공산당
인물들이 모여 발기인단을 구성하고,
↘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관
▶ 1927.2
정우회(1926), 조선민흥회(1926)
등 사회주의 계열이 합류함.
▶ 1927.2
신간회 창립대회
- ‘정치·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강화, 기회주의 배척’을
핵심으로 한 강령을 채택
▶ 1927.5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
창립
▶ 1927
지회가 확장되며 사회주의 세력도 지회를 중심으로 영향력이 커짐.
- 지회는
기존 운동 조직을 기반으로 운영되었지만, 본부의 구체적인 활동 지침이
없어 자율적으로 활동함.
▶ 1927년 말부터
동아일보·수양동우회(흥사단) 인물들이 합류함.
▶ 1928
일제의 압박으로 정기대회가 열리지 못하고, 조선일보 계열도 신간회에서
이탈함.
▶ 1928.6
복대표회의로 허헌 집행위원장 체제가 출범하며, 다수의 사회주의자가
간부로 진출함.
↘ 정기대회를 열 수 없게 되자, 지방 지회들이
대표를 뽑아 자율적으로 개최한 대체 회의
■ 신간회 해소
▶ 1928.12
코민테른은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 재조직 방침을
제시하였고,
- 이에 따라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자와의 협동전선을 폐기하고 노동자·농민 대중을 계급별로
조직하는 노선으로 전환함.
▶ 1929.11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준비하지만,
▶ 1929.12
민중대회사건으로 신간회 주요 인물들이 검거되면서 활동력이 크게
위축됨.
▶ 김병로 중심의 중앙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신간회는 점차 급진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온건적인 노선을 취함.
- 이로
인해,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함.
▶ 1930
사회주의 진영은 대중의 저항과 투쟁이 고조되자 ‘혁명을 위한
대중운동의 전성기’로 인식함.
- 사회주의자의 대중운동 전략 변화와 중앙집행부의 온건화
노선으로 신간회 내 갈등이 심화되어
▶ 1931.5
전국대회에서 ‘해소안’이 통과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