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19 3.1 운동
이후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가 일부 허용됨.
▶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으로 한 단체들이 형성되어 활동함.
▶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
등이 형성되어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을 주창했지만,
- 민족주의
여성운동은 보수적 종교 기반으로 무산계급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음.
▶ 1920s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여성운동에도 무산계급 중심의 사회주의적
이론이 도입됨.
▶ 여성운동을 사회변혁운동의 일부로
보고 조선여성동우회 등 사회주의 여성단체가 활동했지만,
-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져 농촌 여성들에게까지 확산되지
못함.
▶ 1927.2 신간회
결성을 계기로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간 통합
움직임이 일어남.
■ 근우회 창립
▶ 1927.4 전국적
여성단체 구성을 위한 발기총회가 열리고,
▶ 1927.5
일제의 방해 속에서도 근우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함.
- 근우회는 제국주의 억압과 봉건적 유습이라는
이중적 모순 속에 놓인 조선 여성의 특수한 현실을 인식하고,
- 여성들만의 독립적 조직을 통해 항일과 여성해방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의지를 담아 창립함.
- 강연·토론·야학 등 계몽활동을 통해 여성
대중의 의식 향상과 해방운동의 기반을 다짐.
- 전국
60여 개 이상의 지회를 가지며 확산했지만, 사회주의 계열이 성장하며
일부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이탈함.
- 여성운동을
폄하하고 여성을 조롱하는 언론에 맞서 불매운동 등을 전개하며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투쟁을 벌임.
▶ 1929
‘노농부’를 설치해 여성 노동자의 실태를 조사하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며,
▶ 1929.11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 1930.1 경성 여학생시위를 지도하던 일부 간부들이 검거되면서(근우회
사건),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함.
■ 근우회 해체
▶ 1931.5
사회주의의 대중운동 전략 변화 등으로 신간회 해소안이 통과되고,
▶ 근우회 역시 해체 국면에 들어섬.
▶ 1931.6 근우회의
전체대회 소집이 계속 지연되며 중앙 조직이 사실상 해체됨.
▶ 일부
지회들은 활동을 이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