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해방 이후
▶ 해방 이후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지고
교육받은 계층이 늘었지만, 실업과 빈곤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짐.
- 이승만 정권은 학도호국단(1949)을 조직해 학교를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학생들을 시위에
동원했음.
- 또한,
부산 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으로 장기 집권을 시도하며
정권 유지를 꾀했음.
■ 4.19 혁명
▶ 1960.2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2.28 대구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며 학원 통제와
부정선거에 항의했음.
□ 3.15 부정선거
▶ 3.15 오후 선거
당일, 마산에서 민주당 의원을 선두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이를 강제 진압했음.
▶ 오후 7시 시위대가 마산시청 앞에 모여 재선거를 요구하자, 정전과 함께
경찰이 실탄과 최루탄을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 1학년생
김주열이 실종됨.
□ 김주열 최루탄 피격사건
▶ 4.11 오전 11시 마산 신포동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음.
▶ 4.15 이에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주의자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함.
▶ 4.18 오후 1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본관 앞에서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결의한 뒤,
▶ 오후 2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여 연좌 농성을 벌였음.
▶ 4.18 오후 7시 20분
이후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4가에서 정치 깡패들의 기습을
받아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음.
□ 피의 화요일
▶ 4.19 오전 이에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국회의사당과 경무대(현 청와대)로 모임.
▶ 4.19 오후 1시 경찰이 경무대 앞에서 무차별 실탄을 발포하자 분노한 시위대는
격렬한 저항을 벌였고, 서울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며 장갑차를
동원한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함.
- 또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지에서도
시위가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했음.
▶ 4.20 오후 5시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인정하지 않고 시위를 단순한 불평으로 치부하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미국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음.
▶ 4.21~24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당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이기붕은
당선을 사퇴했지만,
▶ 4.24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내려놓고 개각을 발표하며 정권 유지를
시도했음.
□ 대학 교수단의 시국선언
▶ 4.25 오후 3시 서울대 교수 258명이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며 시위를 결의했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에서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음.
🗒️시국 선언문
↘ 부정선거와 정권의 폭력 진압을 규탄하며 책임자
처벌, 학생 석방, 공명선거 실시, 경찰 중립화, 학문의 자유 보장 등을
촉구
▶ 이에 시민과 학생이 동참하며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됨.
- 4.25
민주당은 이승만 하야와 정·부통령 재선거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승만은 외무부 장관에 허정을 임명함.
□ 승리의 화요일
▶ 4.26 오전 10시
새벽부터 시작된 시위는 군중이 점차 늘어나며 세종로에서 중앙로까지
도로를 가득 메웠음.
- 4.26 오전
미국은 대사를 통해 이승만의 퇴진을 촉구하며 개입했고, 허정 등과
하야를 논의한 이승만은 하야 의지를 보였음.
▶ 4.26 오전 10시 30분 라디오로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고,
▶ 4.26 오후 국회는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뒤,
▶ 4.27
이승만은 다음 날 공식 사임함.
■ 이후
▶ 6.15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가결됨.
▶ 7.29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며 제2공화국이 출범했고,
▶ 8.12~19
이어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됨.
▶ 1961
육군 소장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군사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정부를 수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