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이승만 정부의 성립
▶ 1948.7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함께했던 한국민주당을 정부 구성에서
배제함.
▶ 1949.2
한국민주당은 대한국민당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결성함.
□ 정부에 대한 국회의 반발
▶ 1950.5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지 세력은 다수당이 되지 못함.
🐯 1950.9
6.25 전쟁 발발 이후,
UN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며 서울을 수복했지만,
🐯 1951
중공군의 개입으로 시작된 1.4 후퇴 속에 수도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됨.
▶ 1951
국민방위군 사건(1월)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2월) 등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커졌음.
▶ 이에 이승만은 재선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며, 이를 뒷받침할 친위 세력 규합 및 정당 창당을
시도함.
□ 자유당의 분열적 창당
▶ 이승만은 공화구락부(친이승만 세력)와
신정동지회를 통합한 공화민정회(1951.5)를 지원하며 정당 창당에 나섬.
🐯 1951.7
6.25 전쟁 정전회담이 시작됨.
▶ 1951.8
이어 이승만은 광복절 담화에서 정당 결성과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개헌 의지를 드러냈음.
▶ 12.17
이후 공화민정회를 중심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하는 원외 자유당과
▶ 12.23
내각책임제를 지지하는 원내 자유당이 각각 창당됨.
■ 부산 정치 파동
□ 정부의 직선제 개헌 추진
▶ 1952.1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 이승만은
원내 자유당의 내부 분열을 유도했고, 원외 자유당과 보수 단체는
전국적으로 개헌안 부결 반대운동(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함.
▶ 이에
맞서 국회는 ‘호헌결의안’을 통과시켜 헌법 수호 의지를 분명히 함.
□ 야당의 맞대응
▶ 4.16 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며 반격에 나섬.
▶ 이에
이승만은 장택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장택상 중심의 신라회(1952.5)가 개헌 세력으로부터 이탈함.
▶ 5.14
장택상은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새로운 개헌안을 정부안으로
제출함.
- 또한, 정치 폭력 세력이 개입한 개헌안
부결 반대 운동은 군인 피격 사건을 계기로 격화되며, 국회 해산
요구까지 이어짐.
□ 전시 계엄령 선포
▶ 25일 정부는 부산과 경남·전남·전북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 26일 아침 40여
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국회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감행함.
▶ 27일
이 사건에 대해 정부는 공산당 자금 유입 혐의라고 발표했고, 이어
이승만은 지방의회를 동원해 국회 해산 여론을 인위적으로 조성함.
▶ 국회는
계엄 해제와 의원 석방을 요구하며 맞섰지만, 이승만은 추가 구속과 국회
해산 위협으로 강력히 대응하며 개헌안을 강행했음.
▶ 6.3
그러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경고 서한이 전달되자, 이승만은 국회
해산을 단념하게 됨.
□ 발췌개헌안 통과
▶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고 일부
내각책임제 요소를 포함한 발췌개헌안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함.
▶ 야당은
타협하지 않겠다며 맞섰지만, 이승만은 경찰 동원과 국회 출입 통제로
개헌안 통과를 강제했음.
▶ 결국 미국이 유엔군 군정
가능성을 언급하자 야당은 저항을 포기했고,
▶ 7.4 경찰과 군인이 국회를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은 기립 투표로
통과되며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됨.
■ 이후
▶ 1952.8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하여 1인 권력 체제의 기반을
마련함.
🐯 1953.7 6.25
전쟁 정전 협정 조인
▶ 1954.11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