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60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종식된 후, 한국 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함.
□ 군 내부의 움직임
- 1960.5~ 군
내부에서는 하급 장교들이 상급 장교들의 용퇴를 요구하는 정군 운동이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은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음.
□ 사회 운동 활성화
▶ 학생들은 국민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을 추진하며
반미 자주화 운동과 통일 논의까지 주도했고, 언론과 노동계에서도
민주화와 자율성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음.
▶ 이에
민주당 정부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체제 위협 요소를 통제하기 위해
집시법과 반공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이는 2대 악법 반대투쟁(1961.3)으로 이어지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음.
□ 미국의 정책 변화
▶ 1961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무상 원조 대신 차관 중심의 대외 경제
정책을 추진했음.
- 이는 제3세계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해
냉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군부를 친서구적이고
반공적인 새로운 지도 세력으로 인식함.
■ 군사정변
□ 서울 장악
▶ 1961.5.16 새벽 박정희와 육사 8기생들이 이끄는 군 병력은 한강을 건너
쿠데타를 시작했음.
▶ 헌병 제7중대와의 교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육군본부, 서울시청, 경찰국, 방송국 등을 장악하며 서울을 통제함.
▶ 이어
방송을 통해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함. 🗒️혁명 공약
↘ 반공 태세 강화, 자유우방과의 협력, 부패 척결,
민생 안정 등을 이루고 민간에 정권 이양을 약속
□ 장면 정부의 대응
▶ 5.16 오전 미국은
박정희 세력과 거리를 두고 민주당 정부를 지지한다고 발표함.
▶ 장면
총리는 미 대사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내정 불간섭 원칙을 들어 직접
개입을 거부당함.
▶ 5.16 오전
유엔군 사령관과 미 대사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데타 진압을
제시했지만, 윤보선은 쿠데타 진압에 반대함.
□ 군사정부 출범
▶ 5.18 장면 총리가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하면서 군사정권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함.
▶ 5.19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고,
▶ 5.20
미국은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했으며, 같은 날 군사정부는 혁명내각과
중앙정보부를 출범시킴.
■ 이후
□ 정화 조치
▶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뒤,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정치인 숙청, 사회 단속, 언론 통제, 농촌 지원 등의 '정화
조치'를 실시했음.
- 동시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강화하여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고, 민정 이양을 2년 연기하겠다고 발표함.
▶ 미국은
이러한 조치를 비판하면서도 박정희를 초청하여 그의 권력에 힘을
실어줬고, 결국 군사정권은 대내외적인 압박에 직면하여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함.
□ 개헌과 민정 이양 준비
▶ 1962.12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와 직접선거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 1963.2
이후 김종필을 중심으로 민주공화당이 창당되면서 군정 세력의 민정 이양
준비가 본격화됨.
□ 5대 대통령 선거
▶ '4대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세력의
정치자금 비리와 부패가 드러났지만,
▶ 1963.8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박정희는 군에서 전역하고 민주공화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민간 정치 참여를 선언했음.
▶ 1963.10
이어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근소한 차로 이기고 민간 대통령으로
공식 당선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