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백제 30대 무왕

여장, 29대 법왕의 아들, 31대 의자왕의 아버지
600년부터 641년까지 약 42년 동안 왕위에 있었음.

무왕은 친왕 세력을 등용하고 좌평제를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음.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고, 한강 유역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성과는 제한적이었음.
내부적으로는 익산을 새로운 거점으로 개발하고, 왕흥사·미륵사 등을 창건함.

무왕

■ 즉위 이전
 ▶ 백제는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대가야까지 멸망하면서 점차 고립되었음.
 ▶ 598 이후 27대 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28대 혜왕이 즉위하였고,
 ▶ 599 혜왕의 뒤를 이어 29대 법왕이 왕위에 오름.

■ 재위 기간
 ▶ 600년 법왕이 세상을 떠나고, 무왕이 즉위함.

□ 왕권 강화
 ▶ 602 귀족 세력이 주도한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에 크게 패배하자,
 ▶ 무왕은 이를 계기로 친왕 세력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했음. 
 ▶ 또한 좌평을 6좌평제로 개편하고 22부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여 중앙 정치 구조를 국왕 중심으로 재편함. 

□ 고구려를 견제
 ▶ 607 무왕은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했으나, 이를 알게 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였음.
 ▶ 611 이후 무왕은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계획에 맞춰 군기를 청했지만,
 ▶ 612 실제 전쟁에서는 별다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았음.

□ 신라와 대립
 ▶ 624 무왕은 속함성을 비롯한 여섯 개 성을 공격해 점령하며 소백산맥 동쪽 지역으로의 진출 기반을 마련하였음.
 ▶ 또한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가잠성을 세 차례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 627 웅진성에 군을 주둔시키고 한강 유역 회복을 다시 시도했으나, 신라가 당에 지원을 요청하고 당의 조서가 전달되자 공격을 중단함.

□ 익산 천도설
 - 익산에는 무왕과 관련된  익산 왕궁리 유적 (사적 제408호),  익산 제석사지 (사적 제405호),  익산 쌍릉 (사적 제87호) 등 여러 유적이 남아 있는데,
 ▶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실제로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임. 

□ 강화된 왕권
 ▶ 630 무왕은 사비의 궁궐을 수리하고
 ▶ 631 장자인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계승을 분명히 하였음.
 ▶ 631 또한 백제가 수의 국서를 탈취해 왜와의 관계가 악화되자(608), 이를 회복하기 위해 손자 풍장을 왜에 인질로 보냈음.
 ↘ 이후 풍장은 백제 멸망 후 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귀국함.

□ 왕흥사와 미륵사 창건
 ▶ 634 무왕은 위덕왕 때 세워진 왕흥사를 다시 지어 완공하였으며( 부여 왕흥사지 , 사적 제427호),
 - 634 궁남지( 부여 궁남지 , 사적 제135호)를 조성하였음.
 ▶ 639년 이어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 익산 미륵사지 , 사적 제150호)를 창건함. 

□ 서동 설화
 ▶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연못의 용과 과부 사이에서 태어났고,
 ▶ 마를 캐며 살았기 때문에 ‘서동’이라 불렸음.
 ▶ 서동은 ‘서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고, 결국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함.
 ▶ 신통한 재능으로 진평왕의 신임을 얻은 서동은 덕 있는 인물로 여겨져 인심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백제의 왕이 됨.
 ▶ 이후, 무왕과 왕비는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만난 일을 계기로 미륵사를 세운 것으로 전해짐.

 ▶ 하지만,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금제 사리봉안기에서 미륵사를 창건한 건 백제의 사택왕후로 나옴.

■ 사후
 ▶ 641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의자왕이 즉위함.

익산 천도설


# 참고 자료
[무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