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632(631?)
무왕은 장자인 의자를 태자로
삼아 후계 체계를 안정적으로 마련함.
■ 재위 기간
▶ 641년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의자왕이 즉위함.
- 효와 우애를
중시한 의자는 왕족과 귀족, 백성의 신뢰를 얻어 큰 반대 없이 왕위를
잇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
□ 왕권 강화 작업
▶ 642.1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이복 형제 세력과 유력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했고,
▶ 642.2
이어 지방을 순행하며 백성을 위로하고 사면을 시행해 내부 기반을
다짐.
▶ 642.7 또
신라의 미후성(지금의 경상남도 서쪽 일대로 추정) 등 40여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음.
□ 대야성 전투 이후 삼국의 대립 구도 변화
▶ 642년 8월 대야성을 함락해 신라를 압박했음.
↘ 이 전투에서 신라 김춘추의 딸과 사위(대야성
도독)가 목숨을 잃음.
▶ 642 겨울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했지만,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 643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공격하려
했으나, 선덕여왕이 당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세를 멈춤.
↘ 당항성(당성)은 신라의 대중 교역·외교
항구
- 644 장자인
융을 태자로 책봉함.
- 의자왕은 즉위 초기
매년 당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 정벌에도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 645
실제로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백제는 오히려 당을 지원하던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았음.
▶ 648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해 백제 공격을 요청했고, 당이 이를
받아들임.
▶ 651~652
이에 백제는 다시 당과 외교를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당과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지게 됨.
→ 국제 정세는 ‘백제·고구려 대 신라·당’이라는 대립 구조로
굳어짐.
□ 재위 후반
▶ 655 > 의자왕은
권력을 임의로 행사하고 왕비 은고를 지나치게 총애해 충신의 간언을
멀리하며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 657
왕서자 41명을 좌평(제1품 관등)에 임명해 좌평의 정원제를 철폐하고,
왕족 중심의 권력 구조를 강화했음.
▶ 이후 달솔(제2품
관등) 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떠오르며 좌평을 대신했고, 태자도 융에서
효로 교체됨.
□ 사비성 함락
▶ 660 신라와 당이
연합해 대규모로 백제를 공격하자 의자왕은 대응책을 논의했지만, 내부
의견이 갈려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 당
수군은 백강(지금의 금강 하구)으로 상륙해 사비로 진입했으며, 신라
육군은 탄현을 넘음.
▶ 660.7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계백이 결사적으로
맞섰으나, 사비성으로 향하는 길이 열림.
▶ 660.7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주했고, 왕자들 사이의 내분 속에 항복이 이어지며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었음.
□ 백제 멸망
▶ 660.7
웅진성(현재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재기를 노리던 의자왕은 방어
책임자의 배신으로 결국 당에 항복했고,
▶ 660년 8월 사비성에서 항복식이 열리며 백제는 멸망함.
▶ 이후 의자왕과 왕족, 대신, 백성들은 당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됨.
■ 사후
▶ 낙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왕은 생을 마쳤으며,
- ‘오’와
‘진’의 마지막 왕묘 근처에 비석을 세웠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묘의
위치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음.
▶ 2000
충청남도 부여군이 능산리 고분군( 부여 왕릉원 , 사적 제14호) 내에 의자왕의 혼을 달래기 위한 가묘를 마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