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525 성왕의
큰아들로 태어남.
□ 관산성 전투
▶ 551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차지했으나,
▶ 553
신라의 급습으로 상실했고, 태자 여창은 원로 반대를 무릅쓰고 관산성에
보루를 쌓아 보복전을 준비했으나,
▶ 554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였음.
■ 재위 기간
▶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탈출해 돌아온 태자 여창이 왕위에 오름.
□ 약화된 왕권
▶ 554, 561
위덕왕은 부왕의 복수를 내세워 신라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 555
관산성 패전의 책임을 지고 출가를 결심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출가
대신 100명의 도승을 허락하고 공덕재를 열었음.
▶ 555
또한 동생 혜를 왜에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추진하였음.
□ 성왕을 기리는 추복 사업
▶ 567 위덕왕은 성왕의 유해를 부여 능산리에 안치하고 그 주변에
국가 규모의 능사(부여 능산리 사지)를 세움.
- 여동생 공주가 사리를 봉안했으며, 이는 성왕계
왕족이 주도한 것으로 보임.
▶ 이를 통해 성왕의 권위를
계승하고 왕권을 재정비하는 계기를 마련함.
□ 외교를 통한 왕권 강화
- 위덕왕은 남조 진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 570~572 북조 북제와도 매년 책봉·조공 관계를 맺으며 외교를
강화하였음.
↘ 백제는 주로 남조와 교류해 왔으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와도 외교 관계를 확대함.
▶ 575 또한,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함.
▶ 577
북조에서 새로 등장한 북주(북제 멸망)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 동시에 왜에 불상과 불경을 전하고 승려와 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교류를 더욱 강화하였음.
- 한편 백제는 이 시기에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함.
▶ 581
수가 건국되자, 백제는 가장 먼저 축하 사절을 보내며 외교 관계를
맺었고,
▶ 589 이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는 수와의 외교를 한층 더 강화하였음.
▶ 598 또한 수가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는 군도의
역할을 자청하며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지만,
▶ 이 때문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됨.
■ 이후
▶ 598
위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혜왕이 즉위함.
□ 위덕왕의 아들
- 부여 왕흥사지 (사적 제427호)에서 발견된 청동 사리함에 일찍 사망한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
- ‘일본서기’에 따르면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좌태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 ‘쇼토쿠 태자와 두 왕자상’을 그렸다고
전해짐.
▶ 1993
부여 능산리 사지 (능사, 사적 434호)에서
백제 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와
석조사리감 (국보
제 288호)이 발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