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대야성 전투


642년 8월

백제는 한강 유역 상실과 관산성 전투 패배로 국력이 약화됐지만,
이후 힘을 회복해 신라를 압박하며 대야성을 함락했음.
이를 통해 백제는 낙동강 서쪽 거점을 확보해 옛 가야권 영향력을 되찾았고, 신라는 대당 외교에 나서게 됨.

대야성전투

■ 배경
□ 신라의 배신
 ▶ 551 백제 성왕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공격·함락해 백제는 하류 6군을, 신라는 상류 10군을 차지하며 고구려를 한강 북쪽으로 밀어냈음.

 - 이후 북진 전략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엇갈렸는데,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를 확보할 수 있는 백제와 달리 신라는 백두대간의 척박한 산간지대만 얻게 되는 구조였음.
 ▶ 연합 작전을 신라가 거부하자 백제는 태자 여창의 군대를 앞세워 단독으로 북진했지만,
 ▶ 고구려와 비밀리에 휴전한 신라가 백제의 배후로 돌아서자 결국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철수했고,
 ▶ 553 신라는 그 공백을 틈타 한강 하류를 그대로 차지했음.

□ 백제의 보복전 실패
 ▶ 554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태자 여창과 왜·가야 연합군 3만을 이끌고 신라에 보복전을 벌였으나 성왕이 복병의 기습으로 전사하며 전쟁에 대패하게 됨.

 ▶ 백제는 한강 유역과 가야에 대한 영향력, 남해 해상 네트워크까지 상실하며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후에는 북진보다 신라에 대한 보복전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됨.
 ▶ 반면 신라는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중국과의 교역 기반을 마련했으며,
 ▶ 562 가야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낙동강과 남해안의 해상권까지 손에 넣음.

□ 백제의 국력 회복
 ▶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는 국제적 고립과 귀족 간 권력 다툼으로 왕실 권위가 흔들렸지만,
 ▶ 600  무왕이 즉위해 적극적인 대외 공세를 펼치며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했음. 
 ▶ 641 이어 즉위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군사 압박을 본격화하여
 ▶ 642.7 직접 친정에 나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하며 공세를 강화함.

■ 대야성 전투
 ▶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낙동강 서쪽의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도록 지시함. 
 ↘ 대야성은 낙동강 서부 방면 신라 최후의 방어 거점이자 백제의 소백산맥 진입로를 차단하는 핵심 요충지

 ▶ 백제군이 대야성을 포위하자 성안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지방 지주 세력은 백제와 내통해 성안에 불을 지르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음.
 ↘ 대야성 도독 김품석(김춘추의 사위)은 평소 방탕한 행실로 지방 지주 세력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이들은 신라에 등을 돌리게 되었음.
 ▶ 전세가 기울자 김품석은 백제군에 항복 의사를 전했고, 성문이 열리자 백제군은 곧바로 항복한 신라군을 기습했음.
 ▶ 김품석은 그제야 계략을 알아차리고 처자식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 결국 대야성은 백제군에 의해 완전히 함락됨.

 ▶  이로써 백제는 낙동강 서쪽 옛 가야권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했고, 
 - 신라는 서부 국경을 크게 잃고 방어선을 압량(지금의 경상북도 경산)까지 후퇴시킨 데다, 김품석의 실책을 계기로 선덕여왕을 겨냥한 반대파의 정치공세가 거세졌음.

■ 이후
 ▶ 642.8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위협했음.
 ↘ 당항성은 신라가 당과 연결되는 유일한 해상 통로로, 이곳을 잃으면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 있음.

□ 김춘추의 외교
 ▶ 642.10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복수심에 고구려로 건너가 백제 토벌을 위한 군사 지원을 청했지만, 연개소문에게 억류되었다가 간신히 귀국함.

 ▶ 645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선 상황에서
 ▶ 648  김춘추는 당 태종을 직접 찾아 협력을 요청했고, 태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사 지원을 약속함. 

대야성전투


# 참고 자료
[대야성 전투]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