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신라의 배신
▶ 551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공격·함락해 백제는 하류 6군을, 신라는 상류 10군을 차지하며 고구려를
한강 북쪽으로 밀어냈음.
- 이후 북진 전략을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엇갈렸는데, 서해안의 비옥한 평야를 확보할 수
있는 백제와 달리 신라는 백두대간의 척박한 산간지대만 얻게 되는
구조였음.
▶ 연합 작전을 신라가 거부하자 백제는 태자
여창의 군대를 앞세워 단독으로 북진했지만,
▶ 고구려와
비밀리에 휴전한 신라가 백제의 배후로 돌아서자 결국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철수했고,
▶ 553
신라는 그 공백을 틈타 한강 하류를 그대로 차지했음.
□ 백제의 보복전 실패
▶ 554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는 태자 여창과
왜·가야 연합군 3만을 이끌고 신라에 보복전을 벌였으나 성왕이 복병의
기습으로 전사하며 전쟁에 대패하게 됨.
▶ 백제는
한강 유역과 가야에 대한 영향력, 남해 해상 네트워크까지 상실하며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후에는 북진보다 신라에 대한 보복전에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됨.
▶ 반면 신라는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중국과의 교역 기반을 마련했으며,
▶ 562
가야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낙동강과 남해안의 해상권까지 손에 넣음.
□ 백제의 국력 회복
▶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는 국제적 고립과 귀족 간
권력 다툼으로 왕실 권위가 흔들렸지만,
▶ 600
무왕이 즉위해
적극적인 대외 공세를 펼치며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했음.
▶ 641 이어 즉위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군사 압박을 본격화하여
▶ 642.7
직접 친정에 나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하며 공세를 강화함.
■ 대야성 전투
▶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에게 낙동강 서쪽의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도록
지시함.
↘ 대야성은 낙동강 서부 방면 신라 최후의 방어
거점이자 백제의 소백산맥 진입로를 차단하는 핵심 요충지
▶ 백제군이 대야성을 포위하자 성안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지방 지주 세력은 백제와 내통해 성안에 불을 지르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음.
↘ 대야성 도독 김품석(김춘추의 사위)은 평소
방탕한 행실로 지방 지주 세력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이들은 신라에
등을 돌리게 되었음.
▶ 전세가 기울자 김품석은 백제군에 항복 의사를
전했고, 성문이 열리자 백제군은 곧바로 항복한 신라군을 기습했음.
▶ 김품석은
그제야 계략을 알아차리고 처자식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 결국
대야성은 백제군에 의해 완전히 함락됨.
▶
이로써 백제는 낙동강 서쪽 옛 가야권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했고,
- 신라는 서부 국경을 크게 잃고 방어선을
압량(지금의 경상북도 경산)까지 후퇴시킨 데다, 김품석의 실책을 계기로
선덕여왕을 겨냥한
반대파의 정치공세가 거세졌음.
■ 이후
▶ 642.8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위협했음.
↘ 당항성은 신라가 당과 연결되는 유일한 해상
통로로, 이곳을 잃으면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될 수 있음.
□ 김춘추의 외교
▶ 642.10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가운데,
▶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는 복수심에 고구려로 건너가 백제 토벌을 위한 군사
지원을 청했지만, 연개소문에게 억류되었다가 간신히 귀국함.
▶ 645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선 상황에서
▶ 648
김춘추는 당 태종을 직접 찾아 협력을 요청했고, 태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사 지원을 약속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