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백제 건국 이전
▶ 867 견훤은 농민
출신에서 장군으로 성장한 아자개의 아들로, 상주 가은현(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나
▶ 서남 해안을 지키는
군인으로 복무했음.
□ 전국적 농민 반란
▶ 889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때
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지며 민란이 확산되자
▶ 892 견훤은 지지 세력을 모아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장악해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함.
■ 후백제 건국
▶ 900년 견훤은 완산주(지금의 전라북도 전주)를 차지하고, ‘백제
계승’을 내세우며 후백제를 세움.
- 이후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관부를 설치해
국가의 성립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했으며, 6두품 세력을 등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갔음.
□ 국정 운영의 방향
- 국가 정체성 측면에서는 백제(660년 멸망)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어 유민들의 지지를 끌어냈으나, 실제
행정에서는 신라식 관등 체계를 사용하였음.
- 왕도
인근은 불교를 통해 결속을 다지고 주요 요충지에는 지방관과 왕자를
파견하여 직접 통제했지만,
- 그 외의 지역은
스스로 귀순(귀부·내투)해 온 호족을 포용하거나 혼인 관계를 맺는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대를 강화하며 지방 세력을 관리했음(고려 왕건의
방식과 유사).
□ 후고구려 궁예와의 대립
▶ 901 송악(지금의
황해북도 개성시)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고,
▶ 912
후고구려 장수 왕건이 덕진포(지금의 전라남도 무안으로 비정)에서
후백제와 전투를 벌임.
□ 고려 왕건과의 대립
▶ 918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자, 견훤은 사신과 선물을 보냈음.
▶ 920
이후 견훤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으나, 신라를 돕기 위해 고려군이
출동하자 군대를 물리게 됨.
▶ 925
조물성에서 견훤과 왕건이 직접 격돌했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고, 결국
인질 교환을 조건으로 다시 화친을 맺음.
▶ 926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 있던 견훤의 사위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자, 견훤이 이를 고려의 고의적인 소행으로 의심하면서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다시 악화함.
□ 공산 전투에서 승리
▶ 927.9 견훤은
근품성을 공격해 불태운 뒤 고울부를 습격하고,
▶ 927년 11월
곧바로 신라 왕경(경주)으로 진군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제56대 경순왕을
옹립했음.
▶ 한편, 신라의 요청을 받은 왕건은 지원군을
이끌고 출동했으나 도착이 늦어 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임.
- 이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가 고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견훤은 이 승리로 경상도 일대에서 세력을 크게
넓힘.
▶ 928 견훤은
강주(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를 습격하고 부곡성을 함락하며 공세를
이어갔으며,
▶ 929
이어 의성부(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를 공격했음.
□ 고창 전투에서 패배
▶ 930년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며 기세가 크게
꺾임.
▶ 이후에도 후백제와 고려의 공방은 계속되었지만,
후백제는 예전 같은 우위를 보이지 못했고 지방 세력의 고려 귀부가 점차
늘어났음.
■ 고려로의 귀부
□ 후백제 왕위 계승 분쟁
▶ 935년 3월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형들(신검·양검·용검)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음.
▶ 935.6 그러나
견훤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고려의 영토였던 금성(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으로 귀순했고, 이에 왕건은 그를 ‘상부’라 높여 부르고 거처를
마련해 줌.
□ 일리천 전투
▶ 936 견훤은
자신을 몰아낸 신검 일당을 처벌해 달라며 왕건에게 군대를 일으켜
달라고 요청함.
▶ 936
이에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군과
대치했음.
▶ 전투에 앞서 견훤이 고려 진영에서
열병하자 후백제 장군 효봉·덕술 등이 고려에 항복함.
▶ 이후
고려군이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면서 후백제군은 급속히 붕괴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함.
□ 견훤의 죽음
▶ 신검은 황산(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탄현에서
왕건에게 항복했고,
▶ 왕건은 신검의 왕위 찬탈이
본심이 아니라 신하들의 협박 때문이었다며 그의 죄를 용서하자,
▶ 936년
이를 지켜본 견훤은 화병이 나 수일만에 황산의 절에서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