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간도 협약


을사늑약 이후

1860년대부터 조선인과 중국인의 간도 이주로 인해 영토 분쟁이 발생함.
이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청과 협약을 맺음.


간도는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만주 지역으로,
두만강 북쪽 지역을 북간도,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고 부름.

■ 조선과 청의 영토 분쟁
□ 간도 이주
 - 조선 후기부터 조선과 청은 간도 지역의 출입을 제한함.
 ▶ 1860 2차 아편전쟁에 패배한 청은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뒤, 한족의 간도 이주를 장려함.
 - 1863 고종 즉위
 ▶ 1869 함경도 대기근으로 조선인들도 간도로 이주함.
 ▶ 1882 청이 간도 조선인을 청나라 백성으로 편입하려 하자, 조선은 이들을 귀환시키겠다고 대응함.
 ▶ 1883 간도 주민들은 백두산정계비(1712)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며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함. 
 - 이에, 어윤중(37)은 간도 문제를 공식 제기할 것을 정부에 요청함.
 ↘ 어윤중은 갑오개혁에 참여한 개화파 정치인

□ 국경 확정 협상(감계 협상)
 ▶ 1885 을유감계
 - 조선 측 감계사 이중하(40)는 해란강-분계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 청 측은 토문강이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반박하며 백두산이 청나라 발상지라고 강조함.
 ▶ 조선의 문헌에서 토문강을 두만강과 동일한 강으로 기록한 내용이 확인됐지만, 협상은 결렬됨.

 ▶ 1887 정해감계
 - 이중하는 청의 주장을 수용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의 경계를 확정했으나, 상류 지역의 경계 합의에는 실패하고,
 - 양국은 다시 회동하지 않아 경계 문제는 확정되지 않음.

 ▶ 1890 청은 간도 주민들에게 변발과 복장을 강요하고, 호구·토지 조사를 하여 강제로 자국에 편입시킴.
 ▶ 1894 청일 전쟁
 ▶ 1897 대한제국 선포 이후,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등 언론과 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이 영토 문제를 제기함.
 ▶ 1898 오삼갑 등이 간도 영유권과 주민 보호를 요청하고,
 ▶ 1899 대한제국이 협상에 나서 주민 보호 조항을 포함한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함. 

■ 간도 협약
□ 무력 충돌
 ▶ 1900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자, 간도에서 청의 행정·군사 공백이 발생하며 한인들이 약탈 피해를 당함.
 ▶ 1901 대한제국은 회령에 변계경무서를 두어 한인 보호에 나섰지만, 청과 러시아에 의해 활동이 제한됨.
 ▶ 러시아는 대한제국과 청의 주민 공동 보호를 제안했으나, 청이 거부하면서 무력 충돌이 이어짐.

 ▶ 1902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시찰관으로 파견해 간도 한인의 호구·부동산 조사와 청의 세금 수탈 실태를 조사함.
 ▶ 1903 이범윤은 관리사로 승격되어 사포대를 조직해 청과 무력 충돌을 벌임.
 ▶ 1904 일본이 개입하여 무력 충돌 완화를 위한 잠정적 합의를 맺음.

□ 을사늑약
 ▶ 1904.2 러일 전쟁 개전
 ▶ 1905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은 박탈되고, 이범윤(50)은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의 중심인물이 됨.
 ▶ 1907 통감부에서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고, 조선의 논리로 간도 문제에 대응함.

□ 간도 협약
 ▶ 1909.9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이 청의 요구를 수용하며 간도 협약을 맺음.
 - 청이 간도를 차지하고 주민도 관할함.
 - 일본은 간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만주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등 이권을 확보함. 
 - 대한제국은 자국의 영토 분쟁에 참여하지 못함.

■ 이후
 - 일본은 만주 지배를 위한 기반을 확보함.
 - 간도는 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 중심지가 됨.




# 참고 자료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간도 협약]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