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879.9.2
안태훈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 1904 러·일 전쟁 → 진남포로 이주하여 회사 설립, 학교 운영 등
애국계몽활동을 함.
▶ 1905.9
포츠머스 회담 - 남만주는 일본의,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이 됨.
▶ 1905.11
을사늑약 → 통감부가 설치되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
▶ 1907.7 1차 러·일
협약 -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이
성립되며,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도 개선됨.
▶ 1907.7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 대한제국 군대해산, 정미의병
▶ 1907.12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서 계동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의병부대를 편성함.
▶ 1908.3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슨을 처단 → 미국에서 재판받음.
▶ 1908 여름
안중근 부대는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지만, 회령에서 패하고
해체됨.
▶ 1908 가을
러시아의 간섭, 의병 내부 갈등, 완진파의 실력양성 주장 등으로 연해주
의병운동은 침체기에 빠짐.
▶ 1909.3
급진파인 안중근은 동의단지회를 조직함.
▶ 이토와
러시아 재무장관의 회담 소식이 대동공보사를 통해서 연해주에 알려지고,
이들은 처단을 계획함.
▶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병탄 정책 등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처단 계획을 자원함.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이토 히로부미 처단)
▶ 1909.10.21
안중근 외 3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여
▶ 10.22
북만주 하얼빈에 도착해서 사전 준비를 마치고 이토를 기다림.
▶ 10.26 하얼빈역에서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성공하고, 곧바로 러시아 헌병대에게 체포됨.
▶ 안중근 일행은 러시아에서 재판받을 것을
예상했지만, 일본에 인계되어 뤼순(여순) 감옥으로 이송됨.
■ 이후
▶ 1910.2
광동도독부에서 재판 시작
▶ 연해주 한인들이 다국적
변호인단을 구성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재판부는 일본 관선변호사만
허용함.
-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토의 죄악 15가지를
지적하고, 의병장으로서 정당한 군인 대우를 요구했으나 거부됨.
▶ 일본
재판부는 1주일간 6회의 공판 끝에 사형 판결을 내림.
▶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미완)을 저술했으며, 다수의 유묵을 남기고
▶ 3.26 독립을 염원하며 30세에 순국하심.
- 국내에선 일진회가 합방 청원 운동을
전개하고, 친일파는 일본에 사죄 캠페인을 벌임.
- 일본은
반일 배후로 신민회 등을 지목했으나 증거가 부족해 관련자들을
석방하고,
- 신민회는 국외 독립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