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립신보
▶ 1903.1~1905.8 약
8,000명의 조선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함.
▶ 1903.9
안창호(26) 등 9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결성함.
▶ 1904
하와이 이주 조선인 중 일부가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조선인이 증가하자,
▶ 1905.4
상항친목회는 공립협회로 확대·개편됨.
▶ 1905.11 공립협회에서 ‘공립신보’를 창간하고, 국내·미국·러시아에
보급소를 설치함.
▶
1908.3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독립에 대해 호의적 여론을 조성하게 함.
↘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일본의
외교적 이익을 대변함.
▶ 1908.4
통감부는 광무
신문지법(1907)을 강화하여 신한민보의
국내 보급을 통제함.
■ 신한민보
- 독립운동 지원과 미주 한인 단결을 목적으로 한
기관지로,
-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림.
▶ 1909.2
(북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국민회로 통합되며,
-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로 이름을 바꿈.
▶ 1910.5
다시 국민회는 대동보국회(북미) 등과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됨.
▶ 1919.4~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원함.
▶ 1925.4
본보의 십계명 게시하며, 기독교적 입장에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함.
▶ 1937.3 국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미주 한인 2세의 항일의식 고취하기 위해 영문 기사를
게재함.
- 미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지원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음.
■ 해방, 이후
▶ 해방 이후엔 한국 재건에 앞장섰으며,
▶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을 지원하고,
▶ 한국 독재의 피해상을
미국 정계에 소개하며 민주화 투쟁에 나섬.
▶ 신한민보는
1990년대까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