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광복 이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
→ 1949.3
북한 지도부는 무력 통일을 구상
→ 1949
주한 미군의 남한 철수(6월),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8월),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10월)이 이어지며 국제
정세가 변화함
→ 1950.5
공산주의 3국(북한, 중국, 소련)은 남한 공격에 합의
■ 6.25 전쟁 발발과 UN군 참전
→ 1950.6.25 새벽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함 → 낙동강까지
진출
-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지만,
1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은 실패함
→ 곧바로
UN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어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
→ 1950.7.7
UN군 구성이 결정됨 -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UN군 사령관으로
임명
- 대통령 이승만은 국군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김
→ 1950.8~9
UN군과 한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킴
→ 9.15 UN군은 261척의 함정과 75,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함
→ 9.26 UN군은
서울 진입 →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도 선까지
북상
→ ‘10.7 통일한국 건의안’에 따라 UN군의
목적을 ‘한반도 원상회복’이 아닌 ‘완전한 군사적 승리’로 재규정
→ 한국군과
UN군은
압록강, 청진까지 진격
■ 중국군 참전
→ 1950.10 20,000여 명의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입
→ 중국군의 서부전선 공격으로 UN군의 방어선이
붕괴함
→ 12.15~23 흥남 철수 작전 - UN군과 한국군, 피난민 철수
→ 12.26
중국군·북한군은 38도 선을 넘어 남진
→ 1951 1.4 후퇴 - 중국군·북한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
→ UN군의
서울 재탈환 이후, 3월 말부터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됨
■ 정전 회담
→ 1951.7.10
정전회담 시작
→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처리
문제 발생 - UN군은 포로들의 자유 송환을, 공산당은 자동
송환을 주장
→ 정전회담이 장기화되는 동안 38선 부근에서 고지 전투가
계속됨
→ 1953.4.16
정전 회담 재개
→ 6.18
이승만 정권은 UN군이 억류하던 송환 거부 포로를 석방
→ 7.27 10:00 정전 협정 조인 - 군사 분계선(휴전선) 확정, 비무장 지대 설치 등을 규정
- 정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에 발효되어 오늘까지
일째 유지되고 있음.
■ 이후 및 영향
- 1953.10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됨
- 이산가족
발생, 수백만 희생자 발생, 산업 시설 대부분 파괴, 민족 간 적대감과
불신으로 분단 고착화
- 남한의 극우 반공 체제
강화와 북한의 단일 지도 체제 수립에 영향을 미침
-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을 증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바르샤바조약기구 등 집단
안보 체계를 강화
■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국민 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 등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