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23
임시정부 존폐를
둘러싼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됨.
▶ 이에 따라 독립 역량을 통합하고 민족유일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됨.
- 1924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과 코민테른의 민족협동전선론은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줌.
▶ 1924
안창호·여운형 등이 ‘대동통일취지서’를 발표했고, 임시의정원이
독립당대표회의 소집을 제의하고,
↘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 사회주의 단체들도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동의함.
■ 민족유일당 운동
□ 중국
관내
▶ 1926.10
북경에서 안창호와 원세훈이 주도하여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가
결성됨.
▶ 1927
한국독립유일당상해촉성회가 결성되어 민족유일당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 1929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 이념과 활동방식 차이 등으로
해체됨.
□ 국내
▶ 1927.2 신간회
창립
▶ 1927.5 근우회
창립
□ 만주 지역
▶ 중국 관내 민족유일당
운동이 만주로 확산되어
▶ 1927
정의부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각기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함.
▶ 1927.4~8
정의부 주도로 길림에서 시사연구회가 조직되고,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은
내부 통합을 추진함.
▶ 1928.5
시사연구회 주관으로 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의가 열려 18개 단체 대표가
참가함.
▶ 하지만, 조직 방식에 대한 차이로 ‘협의회’
계열과 ‘촉성회’ 계열로 나뉨.
- ‘협의회’는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을, ‘촉성회’는 기존 단체 해체 후 새로운
민족유일당 결성을 주장하며 대립함.
▶ 1928.12
결국, 촉성회 계열은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 1929 협의회 계열인 정의부와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일부 세력은
국민부를
조직함.
■ 이후
▶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정당 중심의 민족운동이
전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