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로 민족 운동의 단결을 도모
■ 배경 - 1920년대 일제의 문화 통치기
- 1926.2
중국은 국민당 장제스 주도로 북벌 개시
-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1925) 이후,
보통선거법이 제정되고 사회주의 세력이 의회 진출 준비
- 국내에선
언론 기관이 창립되고 사회주의가 유입되며 대중 운동 조직이
결성되지만,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심화
- 임시정부는
내분과 대중 기반 상실로 민족운동을 지도하지 못함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적·합법적 정치 운동
단체 설립을 구상
→ 1926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자치운동 세력
등장
→ 1927.1
조선일보 계열, 흥업구락부 계열, 서북지역 기독교 세력, 천도교 구파,
불교계, 조선 공산당계는 발기인 구성
- 민족주의
계열 중 타협론자는 제외 → 이후 신간회는
타협주의자들자도 협력을 모색
→ 1927.2
사회주의 계열인 정우회는 통일된 정치 전선 조직을 주장하며 해체
→ 1927.2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민흥회는 신간회와 합동 결의
■ 신간회 창립과 해소
→ 1927.2.15
신간회 창립대회
→ 설립 초기 조선일보, 시대일보,
흥업구락부 계열이 신간회를 주도
→ 1927
말 동아일보와 수양동우회가 합류하고, 사회주의 세력은 지회를 중심으로
영향력 행사
→ 1927.12
지회 100개 돌파 - 지회는 신간회 창립 이전부터 해오던
계몽 운동, 식민지 교육 제도 비판 등을 시행
→ 1928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조선일보 계열은 신간회에서 퇴거
→ 1928.6
복대표회의 - 허헌 집행위원장 체제 출범하며,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간부로 진출
→ 1929.11 광주학생운동 발발 - 신간회는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준비
→ 1929.12
신간회는 13일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하지만, 당일 일제는 신간회 회원
44명을 검거 - 민중대회사건
→ 김병로
중심의 중앙집행부 성립 -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에 대비해 ‘온건화’, ‘개량화’
추구
→ 1930
사회주의 진영은 노동자·농민을 혁명적 대중으로 조직화 시키고자 함
→ 사회주의
계열은 민족주의 계열과 협동 전선을 폐기
→ 1931.5.16 전국대회에서 신간회 ‘해소안’ 통과
■ 이후
-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학 운동에
주력
- 사회주의 계열은 농민, 노동 조합 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