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4.2~1905.9
러·일 전쟁
▶ 1905.11
을사늑약(2차 한·일 협약) → 헌정 연구회
해체(1905.5~11)
-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을 계기로 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근대 문명의 전달자에서 침략자로 변하며,
- 애국계몽운동도 일본을 침략자로 보는 대일 대결론과 문명 전달자로 보는 대일
협력론으로 분화됨.
▶ 1906.4
대한자강회
결성 - 헌정 연구회 계열과 황성신문 계열이 참여
▶ 1907.7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 대한제국 군대 해산
▶ 1907.8 대한자강회 해산
■ 대한협회
▶ 1907.11 해산된
대한자강회 계열에 천도교 계열이 결합하여 대한협회를 조직
- 대한협회는
국부 증강을 위해 교육 보급, 산업 개발, 행정 개선 등 사회 개혁을
목표로 활동하고,
- 대한협회회보와 대한민보 간행,
연설회 개최, 정부에 질의와 건의를 함.
▶ 1908.7
새 회장이 선출되면서 황성신문 계열이 후퇴하고, 친일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함.
- 일본을 동양 문명의 선도자로 인식하며, 을사늑약의 ‘한국이
부강하면 보호를 철회한다’는 문구를 긍정적으로 해석.
- 외교권 상실 후에도 내정 독립 유지 가능성을
주장하며 내정독립론을 펼침.
- 의병운동을 국력
소모로 간주하며 비판하고, 정당 정치 도입을 주장하며 점차 권력을 추구함.
▶ 1908
이완용 내각 탄핵 운동을 전개
▶ 1909.1
순종의 순행 중 송병준이 행패를 부리자,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을
비판
▶ 1909.6
통감부 이토 사임
▶ 1909.9
일진회가 이완용 내각 타도를 목적으로 대한협회, 서북협회와 3파
연합운동을 전개함.
▶ 1909.10 안중근 의사 의거 - 이토가 암살되며 3파 연합은 결렬됨.
▶ 1910.8 한·일 병합 조약 직후,
정치 단체 해산 조치로 대합협회도 해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