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충혜왕의 폐위와 사망
▶ 1337 왕흔은
충혜왕과 원 황실 출신의 덕녕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음.
▶ 1339~1340
충숙왕이 세상을 떠난 뒤,
충혜왕이 복위하였으나,
▶ 방탕한
생활과 사리사욕 추구, 기황후 일족과의 갈등 등으로 원 황실의 신임을
잃었음.
▶ 1343.11
결국 충혜왕은 원으로 압송되었고,
▶ 1344.1
이듬해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사망하며 고려의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음.
■ 즉위 이후
□ 왕흔의 왕위 계승
▶ 당시 왕흔은 어린 나이와 원 황실 부마의 자격이
없다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으나, 원 황제의 질문에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본받겠다고 답하여 왕위 계승을 허락받았고,
▶ 1344년 8세의 나이로 고려 왕위에 올랐음.
□ 국정 개혁과 좌절
▶ 1344 충목왕은 어머니 덕녕공주와 조정의 중신들을 중심으로 국정
개혁을 추진하였음.
- 충혜왕 시기의 측근들을 축출하고,
- 이제현의
개혁안을 바탕으로 보흥고·덕녕고·응방 등을 폐지하였으며,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음.
↘ 보흥고·덕녕고·응방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거나
매사냥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왕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었음.
- 또한
정방을 혁파하고 녹과전의
회복을 추진하였음.
▶ 1345.12 그러나, 개혁을 주도하던 우정승 왕후가 권세가들의 반발로
파면되면서 개혁 정치는 점차 위축되었음.
□ 정치도감의 설치와 개혁의 좌절
▶ 1347 원 황제의 명령으로 왕후 등이 주도하는 정치도감이
설치되어
▶ 관리들의 횡포와 권세가들의 토지·노비 수탈을
조사하고 부정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였음.
▶ 그러나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이 정치도감에서 장형을 받은 뒤
사망하면서 개혁은 크게 위축되었음.
▶ 이후 정치도감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관원들이
소극적으로 활동하며 이전의 추진력을 회복하지 못하였음.
- 1348
경천사에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세워짐.
↓ 국보 제86호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 사후
▶ 1348년 12월
충목왕이 세상을 떠나고, 이복동생인
충정왕이 즉위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