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공과 장원급제
▶ 857 최치원은
신라 왕경(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 868
당으로 유학을 떠났고,
▶ 874 18세에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함.
▶ 2년간 낙양에 머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시 짓기에 전념했음.
▶ 876
이후 당의 관직에 올라 선주(지금의 안후이성 동남부 지역) 율수현위로
임명되었으나,
▶ 877
외국인 신분의 한계를 느껴 관직을 그만둠.
□ 황소의 난기 최치원의 활동
▶ 879 황소의
난(875~884)이 남쪽으로 확산하자,
고변이 진압에 나섰음.
- 당시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어 그의 군영에서 표·장·서계·격문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아 1만여 편에 달하는 글을 지었으며, 그 중 ‘격황소서’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지며 당대의 격찬을
받음.
↘ ‘격황소서’는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란군 수괴 황소를 꾸짖고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지은 격문
▶ 882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자금어대를 하사받는 등 최고 수준의 예우를 받았고,
- 나은과
고운 등 당대 문인들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으며 뛰어난 시인이자 문장가로
명성을 확립함.
■ 신라로 돌아옴
▶ 885 최치원이 당
희종에게 귀국을 요청하자, 희종은 최치원을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함.
▶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제49대 헌강왕에게 관직을 받고 신라에 머물렀음.
▶ 이후
왕명을 받아 ‘사산비명’을 지었고, 당에서 지은 글을 모은 ‘계원필경’을
바쳤으며, 신라에서도 대문장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갔음.
□ 신라의 상황
- 당시 신라는 중앙의 지방 통제·조세 수취
실패로 재정과 민생이 무너졌으며,
▶ 889
농민 봉기와 호족의 분리·독립이 겹치며 전국적 내란 상태에
빠져들었음.
▶ 890 >
최치원은 지방관을 역임하고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 진골이
요직을 독점한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
출신이라는 한계로 뛰어난 능력에도 국가적 위기를 해결할 핵심 역할을
맡지는 못했음.
□ 시무 10여조와 개혁의 좌절
▶ 894 최치원은 시무 10여조를
제51대 진성여왕에게
건의하며 신라에서 뜻을 펼치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함.
▶ 897
진성여왕의 퇴위와 제52대 효공왕의 즉위 과정에서, 최치원은 각각의
상표문을 지었음.
■ 은거 생활
▶ 이후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여러 지역을 떠돌며 정자를 짓고
독서와 시를 벗 삼아 은거했으며,
▶ 말년에는 형 현준과 승려 정현사와 함께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전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