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894.7
갑오개혁 → 갑신정변 가담자들 사면
▶ 1896.1
서재필이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됨
▶ 1896.2
아관파천 →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의 신문사 설립을 지원
▶ 1896.4 독립신문 창간
■ 독립협회 창설과 해산
- 서재필은 중국 사절단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알리고자
함
▶ 1896.7.2
서재필의 건의로 독립협회(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 조직
- 개혁
관료들의 사교모임으로 출발하였지만, 이후 독립문 건립 모금을 위해
회비를 내는 모든 사람에게 회원 자격을 부여
▶ 1896.9
독립문 공사 시작
▶ 1897.7
윤치호가 가입하여 계몽 단체로 발전시킬 것을 건의
▶ 1897.8 정기적인 토론회 개최를 결정하고, 연말까지 34회의 토론회를 펼침
- 신교육 진흥이나
산업 개발 등의 계몽적 성격을 띠었으나 점차 열강의 이권 획득 반대나
의회 설립 등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주제가 많아지며, 고위 관료층의
이탈과 신지식인들의 유입이 이뤄짐
▶ 1897.10
대한제국 선포
▶ 1897.11
독립문 완공
▶ 1898.3 만민 공동회 - 정부는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침략 의도에 대한 비판을 받아
정책을 보류함
▶ 이후, 독립협회의 투쟁 방향은 민권 보장과 참정권 획득으로
전환
▶ 1898.4 서재필은
중추원에서 해임되고, 미국으로 감
▶ 1898.9
고종 암살 기도 사건으로 보수 내각이 붕괴하고 개혁 내각이 수립
▶ 1898.10
전·현직 관료들이 참여하는 관민 공동회 개최
- ‘헌의 6조’를 채택하여 의회 설립, 황제권과 민권 보장에 관한
내용을 고종에게 올림
▶ 박정양 내각은 중추원에 의회 기능 부여와
독립협회에서 의관 수 절반을 선출하도록 관제를 개편
▶ 보수파의
익명서 사건 날조로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됨
▶ 독립협회가
만민 공동회를 열어 집회·시위를 이어가자, 정부는 간부를 석방하고 헌의
6조 이행을 약속
▶ 12.15
중추원 개원
▶ 1898.12
중추원 대신 후보에 박영효가 포함된 것을 확인한 고종은 무력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해산시킴
- 박영효는 1895년
7월부터 정변 도모 협의로 망명 중이며, 1898년 6월 왕위 찬탈 공작을
벌임
■ 의의
- 자유 민권과 자주 국권 확립을 위해 국민
계몽과 민권 의식 향상에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