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883.10
            정부는 박문국을 설치하여 한성순보를 발간
 ▶ 1884.12
            갑신정변 - 박문국이 불에 타면서 한성순보의 발행이 중단되고,
            가담했던 서재필은 외국으로 망명
 ▶ 1886.1
            정부에서 한성주보 발간
 ▶ 1888.7
            박문국이 통리아문에 통합되며 한성주보 폐간
 ▶ 한성신보(1894)
            등 일본이 발행하는 신문 등장 - 한성신보는
            을미사변(1895)의 본거지
 ▶ 1894.7
            갑오개혁 → 갑신정변 가담자들 사면
 ▶ 1896.1
            서재필은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고, 유길준과 신문사 설립에
            합의
 - 갑신정변을 경험한 서재필은 개화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 
 ▶ 1896.2
            아관파천 - 친일 정권 붕괴
 ▶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에게 신문사 설립 자금과 정부가 소유한 건물 임대 등을
            지원
          
            ■ 독립신문
 ▶ 1896.4.7
            창간호 발간 - 순한글과 영문판으로 구성하여 주 3회
            발행
 - 민중의 지식·의식 향상과 조선의 상황을 외국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함 
 -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 건립 사업에 모금
            창구 기능
 - 초기엔 정부 정책을 지지하며
            친러·반일 입장을 보였지만,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자 친러 정권과
            열강의 침략을 비판
 - 주시경이 제작에 참여(~1898.9)
 ▶ 1898.3 만민 공동회 -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여, 고종과 러시아가 이를
            수용
 ▶ 1898.4
            서재필은 중추원에서 해임되고, 미국으로 감
 ▶ 1898.5
            윤치호(독립협회 회장)가 독립신문을 운영 -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역할을 수행
 ▶ 1898.7
            매일 발간함
 ▶ 1898.10
            관민 공동회 -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
 ▶ 1898.12 독립협회 해산 - 독립협회 주요 인물들 체포
 ▶ 1899.1
            윤치호는 덕원 감리에 서임되어 서울을 떠나고,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주필을 맡음
 ▶ 1899.6
            엠버얼리(H. Emberley)가 주필을 맡음
 ▶ 1899.7
            정부의 독립신문 사옥 반납을 요구
 ▶ 1899.12.4
            정부가 서재필에게 판권과 인쇄시설을 인수하며 폐간됨
          
            ■ 사회적 영향
 - 개화의 필요성, 산회 변화에
            필요한 지식 등과 국민주권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
 - 한글의
            보급과 발전을 담당
 - 대한제국의 상황을 외국에,
            외국의 상황을 대중에게 알림
 - 열강의 침략과 국내
            관리의 부패 등을 알리며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보여줌
 ▶ 1898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이 창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