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5.4
일본이 대한제국 원수부를 해산시키고, 군대를 절반 수준으로 감축함.
▶ ~1905.9
포츠머스 회담 -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 1905.11 을사늑약 → 대한제국 외교권 상실
▶ 1907.6
헤이그 특사 파견
▶ 1907.7.19 고종의 강제 퇴위가 발표되자 군중들이 모여 통감부에 반발하고,
- 7.19, 21
시위대(왕 호위 군대)가 이에 호응하며 일본 경찰과 무력 충돌이
일어남.
▶ 7.24 한·일 신협약 → 행정권과 사법권을 통감부가 관장
- 7.26
경남 통영에선 진위대(지방 군대)가 군중과 합세하여 경무서와 일본인을
공격함.
▶ 이에 일본은 시위대의 탄약을 수거하고,
군기창을 점령
■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남대문 전투
▶ 7.31 일본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 이름으로 군대 해산
조칙을 발표함.
▶ 8.1 7:00
조선주차군(주한일본군)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군대 해산을 명령하고,
무기 회수와 병사 집합을 지시
▶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자결
▶ 9:30 자결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무기를 탈환하여 일본군과 교전
시작 - 남대문 전투
▶ 10:00
사정을 모르는 600여 명의 시위대는 무장한 일본군이 둘러싼 해산식장에
모임.
▶ 10:30
일본군이 2연대 1대대 시위대 병영 점령
▶ 11:40
일본군이 1연대 1대대 시위대 병영 점령
▶ 전투에서
지휘관은 잃은 시위대는 전국으로 흩어지고, 대기하던 시위대는 은사금을
받고 해산됨.
■ 이후
▶ 8.2
강원도 원주진위대는 지역민과 합세하여 원주를 장악하고,
- 1907 말
13도 창의대진소에 합류함.
▶ 수원진위대 소속
강화분견대는 개신교도와
대한자강회의 지원을
받아 일진회 출신 군수와
일본 경찰을 처단하고,
- 8.11
강화도를 나와 경기도와 황해도 지역의 의병 부대로 합류함.
→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는 전국에서 의병에 합류하며, 의병
활동이 한반도 중남부에서 전국으로 확산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