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대통령 간선제
▶ 1972 대통령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함.
▶ 1979
이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 군사 반란을 거쳐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함.
▶ 1980.5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음.
▶ 1980.10
이어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제로 개정한 헌법을 마련하였고,
▶ 1981.2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되어 집권을
시작함.
▶ 1987
대통령 임기 만료(1988년)를 앞두고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가 확산됨.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1987.1 박종철은 민주화운동 선배의 행방을 추궁하던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고,
▶ 1.15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음.
▶ 1.16
정부는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자 박종철이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며 쇼크사라고 발표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 1.17
고문에 의한 사망을 시사하는 부검의의 검안 소견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음.
▶ 1.19
이에 치안본부장은 고문에 가담한 수사관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 1.20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하며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을 경질해 정권
책임론을 차단하려 했음.
□ 민주화 운동의 확산
- 박종철 사망 직후 야당과 재야, 학생, 종교계가
고문공대위(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항의
시위와 공동투쟁을 전개하며 민주화 세력이 연합을 이뤘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도 구성되었음.
▶ 2.7~3.2
박종철 국민추도일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추도 시위가 확산되었고, 경찰의
강경 진압 속에서도 시민들이 참여하며 민주화 열기가 거세졌음.
▶ 3.3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펼쳐졌고, 이에 맞선
정부의 탄압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짐.
□ 4.13 호헌 조치
▶ 4.13 김영삼과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며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열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고 헌법 수호를 선언(호헌조치)하자,
▶ 이에
반발한 전국적인 시위가 본격화되었음.
□ 박종철 사건의 진실 폭로
▶ 5.18 천주교
신부가 5.18 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 조작을 폭로하자 반정부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 5.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발족하며 민주화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음.
□ 이한열 열사 피격사건
▶ 6.8 국본이 6월
10일 국민대회를 예고하자,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한 원천 봉쇄에 나섰음.
▶ 6.9
연세대학교에서는 국민대회 참여를 결의하는 총궐기대회가 열렸고,
▶ 6.9 5시경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이한열이 머리를 다쳐
의식불명에 빠짐.
■ 6월 항쟁
□ 국민대회
▶ 6.10 서울을 비롯한 22개 도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고,
▶ 명동성당 농성은 시민들의 지지 속에
계속되었음.
▶ 6.18
국본은 전국 16개 도시에서 ‘최루탄 추방대회’를 열었고,
▶ 6.26
이어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며 6월
항쟁은 정점에 이르렀음.
□ 6.29 선언
▶ 6.29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와 평화적 정권 이양을 핵심으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민주화 운동이 사실상 성공을 거두었고,
항쟁이 마무리됨.
■ 이후
▶ 1987.10
국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되고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 직선제를 담은 새
헌법이 공포됨.
▶ 1987.12
이어 시행된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 1988.2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새 헌법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