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체제
□ 유신체제 형성과 저항
▶ 1972.10 박정희는
남북 대화의 진전을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해 장기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고,
▶ 1975.5
긴급조치 9호를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했음.
↘ 긴급조치 9호는 유신체제에 대한 모든 비판과
저항을 법으로 막고,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한을 정당화해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통제 수단
▶ 1977년 가을
재야 세력과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반유신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함.
▶ 1978 이에
따라 반유신 세력은 ‘민주주의국민연합’을 결성하며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고, 연이어 발생한 여러 사회적 사건은 유신체제의 균열을
촉진시켰음.
↘ 동일방직 사건(1972~1978)과 함평 고구마 사건(1978) 등 여성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단적 저항
▶ 1978.1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신민당)이
여당(민주공화당)을 앞서는 득표율을 기록함.
□ YH무역 사건과 부마항쟁
▶ 1979.8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중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김경숙이 사망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분노와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했음.
▶ 1979.9 이에
정부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직무 수행을 정지시키고,
▶ 1979.10
국회에서는 그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정치적 탄압에 나섰음.
▶ 1979.10 이를 계기로 부산에서
대학생과 시민이 대규모로 참여한 시위가 일어나 마산까지 확산되었으며, 정부는 계엄령과 군 병력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음.
□ 정권 내부 갈등
▶ 반유신 투쟁 속에서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는 대응
방식 차이로 김재규(중앙정보부장)와 차지철(청와대 경호실장) 간의
갈등이 심화했고, 차지철의 월권행위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의 태도는
정권 핵심부의 균열과 내부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음.
■ 10.26 사건
▶ 1979년 10월 26일 저녁
김재규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를 별채에 대기시킨 뒤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현 무궁화동산)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음.
▶ 그 자리에서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으며,
↘ 김재규는 1심 최후 변론에서 10.26은 단순한 권력
탈취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국민 희생 방지, 적화 저지, 한미
관계 복원, 국제적 명예 회복을 위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했음.
▶ 이후 정승화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본부로 이동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 곧 범인으로 지목되어
헌병대에 체포되었음.
■ 이후
▶ 1979.10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비상국무회의가 열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음.
▶ 한편,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하며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했음.
▶ 1979.12
최규하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하며 유신체제 해체
절차에 착수했지만,
▶ 1979.12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부와 군 권력을 장악함.
▶ 1980.1
김재규는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 1980.5
서울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