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10.26 사건

궁정동 사건

YH무역 사건과 김영삼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 민주항쟁으로 독재 정권은 위기를 맞이함.
이러한 상황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며 18년간의 박정희 독재는 막을 내림.
하지만 이후 권력 공백 속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등장함.

1026사건

■ 유신체제
□ 유신체제 형성과 저항
 ▶ 1972.10 박정희는 남북 대화의 진전을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해 장기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고,
 ▶ 1975.5 긴급조치 9호를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했음.
 ↘ 긴급조치 9호는 유신체제에 대한 모든 비판과 저항을 법으로 막고,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한을 정당화해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통제 수단

 ▶ 1977년 가을 재야 세력과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반유신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함.
 ▶ 1978 이에 따라 반유신 세력은 ‘민주주의국민연합’을 결성하며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고, 연이어 발생한 여러 사회적 사건은 유신체제의 균열을 촉진시켰음.
 ↘ 동일방직 사건(1972~1978)과 함평 고구마 사건(1978) 등 여성 노동자와 농민들의 집단적 저항
 ▶ 1978.12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신민당)이 여당(민주공화당)을 앞서는 득표율을 기록함.

□ YH무역 사건과 부마항쟁
 ▶ 1979.8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중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김경숙이 사망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분노와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했음. 
 ▶ 1979.9 이에 정부는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직무 수행을 정지시키고,
 ▶ 1979.10 국회에서는 그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정치적 탄압에 나섰음.

 ▶ 1979.10 이를 계기로 부산에서 대학생과 시민이 대규모로 참여한 시위가 일어나 마산까지 확산되었으며, 정부는 계엄령과 군 병력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음. 

□ 정권 내부 갈등
 ▶ 반유신 투쟁 속에서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는 대응 방식 차이로 김재규(중앙정보부장)와 차지철(청와대 경호실장) 간의 갈등이 심화했고, 차지철의 월권행위와 이를 비호하는 박정희의 태도는 정권 핵심부의 균열과 내부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음.

■ 10.26 사건
 ▶ 1979년 10월 26일 저녁 김재규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를 별채에 대기시킨 뒤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현 무궁화동산)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음.
 ▶ 그 자리에서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살해했으며, 
 ↘ 김재규는 1심 최후 변론에서 10.26은 단순한 권력 탈취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국민 희생 방지, 적화 저지, 한미 관계 복원, 국제적 명예 회복을 위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했음.
 ▶ 이후 정승화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본부로 이동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 곧 범인으로 지목되어 헌병대에 체포되었음.

■ 이후
 ▶ 1979.10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비상국무회의가 열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음.
 ▶ 한편, 전두환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에 취임하며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했음.

 ▶ 1979.12 최규하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긴급조치 9호를 폐지하며 유신체제 해체 절차에 착수했지만,
 ▶ 1979.12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부와 군 권력을 장악함. 

 ▶ 1980.1 김재규는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 1980.5 서울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음.




# 참고 자료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10·26과 12·12]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