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54
사사오입 개헌으로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이 폐지되면서
▶ 1956.5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음. 그러나 조봉암이 약 30%의 득표를
기록하고,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국민 여론의 변화가
나타남.
▶ 1958.5 이어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이 서울 지역에서 참패하며 민심 이탈이
분명해지자,
▶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다음 대선에서 정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함.
■ 3.15 부정선거
□ 부정선거 준비
▶ 1959.3 이승만은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고, 선거 대책을 위한
6인 위원회를 구성했음.
- 최인규는 경찰과 도지사를 교체하며 선거
체제를 정비했고,
- 임화수는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해 자유당을 위한 사전 선거운동에 나섰음.
▶ 1959.6
정부는 경북·강원·경남 등지에서 치러진 재선거를 통해 부정선거를 사전
연습했고,
-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했음.
▶ 1959.8
신도환이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을 맡은 이후, 단체는 폭력과 파괴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섬.
▶ 1959.11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정부의 부정선거 준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
▶ 1960.1
정부는 경북 재선거에서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방식의 부정선거를 사전
연습함.
□ 야당 후보 사망
▶ 1960.1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고,
▶ 1960.2
그 사이 정부는 선거일을 기존 5월에서 3월로 앞당겨 공고함.
▶ 1960.2
이후 조병옥이 미국에서 사망하며, 이승만의 당선은 사실상 확정됨.
↘ 당시 86세였던 이승만이 집권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를 강행함.
□ 야당 탄압
▶ 1960.2 자유당은
기획위원회를 조직하여(1959.9)
은행에서 빌린 거액의 자금을 내무부에 전달해 공무원과 경찰을
부정선거에 동원했고,
▶ 정부는 선거 기간 내내 야당
탄압과 폭력을 묵인하며 연설회 방해, 민주당원 살해 등의 행위를
벌임.
▶ 1960.3
민주당이 부정선거 계획을 폭로했지만, 자유당은 이를 부인하며
부정선거를 강행했음.
□ 부정선거
- 3.15 전국에서 조직적인 부정투표와 폭력이 자행되며 자유당과 경찰,
반공청년단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음.
▶ 극심한 부정선거에 대응해 민주당 마산시당을
시작으로 경남도당과 중앙당이 순차적으로 선거 무효를 선언했으며,
광주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중앙당과 지역 당원들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됨.
↘ ‘3·15 선거 불법·무효 선언문’에는 조기 선거
강행, 유령 유권자 조작, 야당 후보 등록 방해, 선거운동원 폭행·살해,
참관인 축출, 사전·대리·공개투표 강요, 공포 분위기 조성 등 조직적인
부정선거 사례들을 명시함.
▶ 3.15
마산에서 경찰의 발포와
▶ 4.11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으로 민심이 폭발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자유당 붕괴로 이어짐.
■ 관련자 처벌
▶ 1960.5 최인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나,
▶ 1960.10
대부분에게 가벼운 형이 선고되자 국민 여론이 다시 들끓었음.
▶ 1960.12
이에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이 공포되었고,
▶ 1961.4
특별재판소는 3.15 부정선거 1심에서 최인규에게 사형, 이강학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함.
▶ 1961
자유당 관련자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던 중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고,
▶ 1961.7
군사정권은 부정선거 처벌을 위해 특별법을 계승하며 중범죄자 중심의
처벌 방침을 발표했음.
▶ 1961.9
혁명재판소는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최인규는
그날 바로 형이 집행됨.
▶ 1963.5
하지만 일부는 5.16 2주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 1963.11
나머지도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대부분 풀려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