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60년대의 한반도
- 냉전 시기, 남북한은 쌀 소비와 식량 상황을 비교하며 서로의 체제를 선전하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펼쳤음.
▶ 한국 정부는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세농 중심의 농촌 구조로 인해 심각한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했음.
▶ 이에 따라 정부는 혼분식
장려, 절미운동 등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며 식량
문제 해결에 나섬.
□ 국제미작연구소
▶ 1962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필리핀에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설립하고,
↘ 국제미작연구소는 1984년까지 각국의 연구자들이
참여해 IR 계열 벼 품종을 개발함
- 1968 ‘녹색
혁명’을 전략적으로 추진했음. 이는 제3세계 국가들의 식량 생산을 늘려
민심을 안정시키고, 공산 진영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려는 체제 경쟁
전략이었음.
■ 통일벼
□ 통일벼 개발
▶ 1964~ 자포니카
품종을 개량하여 ‘희농1호’ 개발했지만, 보급에 실패함.
▶ 1968
이어 IR 계열 품종에 관심을 갖고 국제미작연구소와 협력해 연구를
추진했고,
▶ 1970 정부 지원 아래 다수확 품종인 ‘IR-667’ 개발에
성공함.
- IR-667은 키가 작고 병충해와 태풍에 강하며
수확량이 30% 이상 높은 장점을 지녔지만, 생육기간이 길어 기존보다
모내기와 못자리를 앞당겨야 하는 단점이 있었음.
- 또한,
동남아시아 인디카 품종에 가까워 찰기 없는 밥맛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았음.
🐯 1970
새마을 운동이
시작됨.
▶ 1971
통일쌀 시식회에서 낮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증산 의지를
반영해 IR-667은 ‘기적의 볍씨’로 불리며, 국민 공모를 거쳐 남북 대결
구도를 상징하는 이름인 ‘통일’로 최종 결정됨.
□ 통일벼 보급
🐯 1972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후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유신체제를 출범시킴.
▶ 1972 정부는 ‘식량증산 작전상황실’을 설치하고 통일벼 보급을 본격
추진했음.
▶ 전국의 농촌지도소를 확대하고 지도 인력을
충원했으며, 방송·교육·회합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재배기술을
전파했음.
▶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도시로 공급하기
위해 곡물 가격을 낮게 유지했고, 통일벼 재배는 유신체제의 강력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실적 중심의 강제 정책으로 추진됨.
▶ 하지만
농민들에게 통일벼는 기존 농사 경험이 통하지 않는 낯선 품종으로
생계를 위협하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 공무원들은
할당 압박 속에 허위 보고를 하거나, 영농자금 중단 등의 제재를 통해
농민들에게 재배를 강요했음.
□ 녹색 혁명
▶ 1975 쌀 자급률 100% 달성과
▶ 1977
헥타르(ha)당 평균 수확량 세계 최고 수준 달성으로 정부는 '녹색 혁명
성취'를 공식 선언했음.
▶ 1978
통일벼는 전체 재배 면적과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핵심 품종이
되었지만,
▶ 1978~1980
도열병과 냉해로 대표 품종인 ‘노풍’이 피해를 입으면서, 통일벼 재배는
점차 줄어들었음.
■ 지원 중단
▶ 1970년대 당시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펼쳤음.
▶ 1978
그러나 2차 석유파동으로 중화학공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자, 정부는
재정적 이유로 농업 지원을 줄였음.
▶ 1979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곧이어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함.
▶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은 통일벼의 확대보급을 공식적으로 중단했으며,
시장에서도 통일벼는 점차 외면받기 시작했음.
▶ 1980년대 후반
이후 통일벼는 일부 지역에서 정부의 추곡수매용으로만 명맥을
이어갔으나,
▶ 1990년대 초반
추곡수매 정책이 폐지되면서 재배와 유통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