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7.6
            헤이그 특사 파견 → 고종 강제 퇴위
 ▶ 1907.7 한·일 신협약 
 -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인사권이 박탈되고 통감이
            내정을 장악함.
 - 부수각서에 군대 해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 1907.8.1
            군대 해산 - 시위대와 일본군의 교전이 있었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됨.
          
            ■ 정미의병
 -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활동에 가담하며 의병의 질적·양적
              향상이 이뤄짐. 
 - 관료부터 농민까지 다양한 신분이 의병장으로
            나서 무장 투쟁을 이끌며 전국적인 항일 구국 전쟁으로 확산하였고,
 - 의병장들은
            연합 작전을 시도하며, 외국 공사에게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알리기도
            했음.
 ▶ 1907.9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시행 이후 포수들도 의병투쟁에 가담했고,
 ▶ 1907.11
            홍범도는 후치령 전투를 시작으로 의병투쟁을 시작함.
□ 13도
            창의군과 서울진공작전
 ▶ 이인영이 관동창의대장을
            표방하며 의병 봉기를 촉구
 ▶ 13도 창의대진소가
            편성되고, 이인영은 지평으로 이동해서 13도 창의대진소 대장으로
            추대됨.
 ▶ 1907.11
            13도 창의군이 서울로 진격을 시작
 ▶ 동대문 약 12km
            지점까지 진격했지만, 전군이 모이기 전에 일본군의 선공으로 격전 끝에
            퇴각하고,
 ▶ 임진각 유역에서 2차 작전을 준비했지만
            실행하진 못함.
 ▶ ~1909
            핵심 지도부 순국
□ 일본의 남한대토벌작전
 ▶ 1908~1909
            전라도에서 의병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일본은 전라도 의병 토벌을
            계획함.
 ▶ 1905.5 말
            부산으로 일본 보병 2개 연대가 파병되고,
 ▶ 1909.7~ 초토화 전술에 의해 전라도 의병은 2개월 만에
              붕괴됨. 
          
            ■ 이후
 - 의병 활동은 약화되었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기반이 마련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