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1904.2
            러·일 전쟁 발발,
            한·일 의정서
            체결
 ▶ 송병회는 동학의 부흥을 위해 일본과 접촉하여
            대동회를 조직 → 진보회로 개칭
 ▶ 1904.8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송병준 주도로 유신회가
            조직 → 일진회로 개칭
 - 정부 정책
            비판, 입헌 주군제 등을 주장하며 친일 활동 전개
          
            ■ 일진회의 활동
 ▶ 1904.12 진보회와
            일진회는 친일·반정부 단체로서 일진회로 통합
 ▶ 1905
            중앙본부와 지부로 조직을 개편하여 이용구와 송병준이 중심으로 활동
  일진회는 일본을 문명화된 국가로 여기고 친일적 입장으로
              활동 
 - 입헌군주제, 경제 개편, 근대적 교육, 화폐
            정리, 금융기관 설치 등 개혁을 주장
 - 대한제국으로부터
            견제를 받았지만, 한국주차군(한일의정서에 근거한 일본군)의 비호를
            받음
 ▶ 1905.9
            러·일의 포츠머스 조약 → 일진회는 보호국화를 자청하는
            선언서를 발표
 ▶ 1905.11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 1905.12 통감부
            설치 - 이토 히로부미(초대 통감)와 우치다 료헤이(흑룡회
            창립) 입국
 ▶ 1905.12
            일진회는 관직에 진출하고, 일본은 일진회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 
 ▶ 1906.8 송병준
            구속 → 우치다는 송병준 석방 조건으로 한·일 병합
            운동을 요구했고, 이용구는 이를 수락
 ▶ 1907.1
            일진회는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
 ▶ 1907.5
            이완용 내각 출범
 ▶ 1907.6
            헤이그 특사 사건 → 송병준, 이용구, 우치다는 고종의 퇴위를 압박
 ▶ 1907.7
            한·일 신협약 → 정미의병
 ▶ 1907.11
            일진회는 정미의병에 대항하여 자위단 결성 → 통감부가
            이를 제재하자 이토와 대립
 ▶ 1908.4
            이용구는 도쿄에서 이토 사임과 대한제국 합방을 선전
 ▶ 1909.4
            일본은 대한제국이 청원하는 형식으로 합병할 것을 결정
 ▶ 1909.10.26 안중근 의사 의거 -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처단
 ▶ 1909.12 일진회는 황제 유지와 한국인 내각 구성을 골자로 하는
              ‘합방청원서’를 일본에 전달 
 ▶ 1910.8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 1910.9
            일진회 해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