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780 김지정의
난이 발생하자 김양상과 김경신이 이를 진압하였으나,
혜공왕은 이미 살해된
뒤였음.
▶ 이후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제37대 선덕왕이
되었으며, 김경신은 공로를 인정받아 상대등에 임명됨.
▶ 784
선덕왕의 양위 소동을 계기로 김주원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커졌고,
김경신은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함.
↘ 김주원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시중과
상대등을 지낸 고위 관료 가문 출신
▶ 785
선덕왕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남.
■ 재위 기간
▶ 785년 유력한 계승 후보였던 김주원이 알천(북천)의 홍수로 궁에 오지
못하자, 김경신이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름.
□ 왕실 권위 강화
▶ 785 원성왕은
장남을 태자로 삼아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는 한편,
- 은퇴한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하고 그의 아들 김종기를 시중으로 임명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음.
- 또한 만파식적을
제31대 신문왕이 아니라
제26대 진평왕과 연결해
무열왕계 이전의 왕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왕위 정당성과 새로운 왕권을 세우려는 의지를
드러냈음.
□ 독서삼품과
▶ 788 유교 경전 이해 수준에 따라 상품·중품·하품으로 관리를
선발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함.
- 귀족·무인 중심 선발에서 벗어나 학문과 행정
능력을 중시한 제도로, 고려 과거제 이전의 독자적 인재 등용
방식이지만,
- 골품제와 추천·화랑도 제도가 병존해
적용은 제한적이었으며, 주로 중하위 실무 관직을 선발한 것으로
보임.
□ 태자 책봉과 왕위 계승 구도
▶ 791 태자
김인겸이 사망한 뒤
▶ 791.1
제공의 난이 발생했지만, 김언승(훗날
제41대 헌덕왕, 김인겸의
차남)에 의해 즉각 진압되고,
▶ 792
원성왕은 둘째 아들 김의영을 태자로 삼았음.
▶ 794
이후 김의영마저 사망하자,
▶ 795.1
원성왕은 장손인 김인겸의 아들 김준옹을 태자로 책봉함.
■ 사후
▶ 798년 12월
원성왕이 세상을 떠나고, 제39대 소성왕이 즉위함.
- 경주 원성왕릉 (괘릉, 사적 제26호)의 무인석(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 , 보물 제1427호)이 서역인의 외모를 하고 있음.
▶ 이후 효공왕까지 120여 년 동안 왕위가 이어지며 새로운
‘원성왕계’가 형성되었고, 왕의 친족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신라 하대의 권력 구조가 본격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