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정치적 성장
▶ 790
제38대 원성왕의 손자인
김언승은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 < 795
이후 이찬에 올라 병부령을 겸임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음.
▶ 799
원성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제39대 소성왕이 즉위하였고,
▶ 800년
이어 소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제40대 애장왕이 왕위에
오름.
- 이때 병부령이자 숙부였던 김언승이 어린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을 함.
□ 김언승의 측근 권력 장악
▶ 801.2 김언승은 어룡성의 장관인 사신에 올라 왕의 근시 권력을
장악하고,
↘ 김언승이 내성(왕실 재정 및 사무 관련)에서
어룡성(행차 관련)을 분리·독립시키고 그 위상을 격상시킨 것으로
보임.
▶ 상대등으로 취임해 정치 전반을 주도했음.
□ 애장왕 대 정치 개혁
▶ 애장왕은 오묘제를 개혁하여
제29대 무열왕과
제30대 문무왕의 사당을
별도로 분리하고,
- 시조와 원성왕 계통의 직계 4대조로 오묘를 재구성하여
원성왕계를 독자적인 왕통으로 확립하고자 함.
▶ 805
애장왕이 18세가 되면서 섭정은 형식적으로 종료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김언승에게 집중되어 있었다고 보임.
▶ 805.8
애장왕은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였는데, 이는
제35대 경덕왕 대의 한화
정책과 유사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봄.
▶ 이어 사찰
창건과 불교 행사에서의 사치를 제한하여 불교계의 폐단을 억제하고,
사찰과 연계된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음.
▶ 808
사신을 파견해 여러 군과 읍의 경계를 획정함으로써 지방 행정 질서를
정비함.
■ 재위 기간
▶ 809년 7월 김언승이 군사를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름.
▶ 809.8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에 사신을 보내 애장왕의 죽음을 알렸다고
하나,
▶ 812 이후
헌덕왕에 대한 책봉이 이뤄짐.
□ 왕권 강화와 사회 불안의 심화
- 왕위 찬탈을 도운 귀족과 6두품 세력의 협조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갔으나, 이러한 소수 중심의 정국 운영은
배제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음.
▶ 814~821
한편 거의 매년 자연재해와 기근이 이어지며 사회 불안이 심화했고,
도적과 초적이 각지에서 발생하면서 백성들의 삶은 크게 피폐해졌음.
□ 귀족 세력의 반란
▶ 822.3
웅천주(지금의 충남 공주시) 도독인 김헌창이 국호를 ‘장안’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킴.
▶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를 장악하였고, 조정은
여러 장수를 차례로 파견해 반란 진압에 나섰음.
▶ 관군의
공세로 성이 함락되기 직전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난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종결됨.
▶ 이후 무열왕계는 왕위 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중앙 정치에서도 영향력을 상실하였음.
▶ 825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도적 세력과 함께 북한산주(한산주 북부, 현재의
서울 북부)를 공격하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됨.
■ 사후
▶ 826년 10월
헌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경주 헌덕왕릉 , 사적 제29호), 동생이 흥덕왕으로 즉위함.
↘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 아들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헌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