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나당 동맹과 당의 약속 파기
▶ 648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정벌한 뒤, 평양 이남의 영토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약속함.
▶ 660
그러나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 663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한 이후, 당은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 실질적으로는 당의 지배 질서 안에 신라를
편입시키려는 조치
▶ 664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음.
▶ 665.8
이후 당은 취리산 회맹을 통해 문무왕과 부여융이 백제의 옛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도록 함.
▶ 668
이어 신라와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했음.
□ 신라의 대응
▶ 이러한 당의 직접 통치 시도와 정벌 과정에서의 군령권 침해,
그리고 비열홀을 둘러싼 영토 갈등이 심화되자, 신라는 전쟁 준비에
돌입함.
▶ 668 먼저 왜와의
외교 관계 회복을 추진하고,
▶ 669
사면과 구휼 정책을 시행해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
대비한 내부 결속을 강화하였음.
■ 신라-당 전쟁
□ 신라의 선제공격
▶ 670.3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 지역의 오골성을
선제공격하였고,
- 670.4
수임성(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서는 검모잠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음.
▶ 이에 당은 요동과 한반도로 군대를
진군시킴.
□ 백제 영토 회복
▶ 670.7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공격하며 본격적인 점령에 나섬.
▶ 671.6
이에 당은 안동도호부(평양 지역)의 설인귀를 파견해 석성(백제
지역)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음.
▶ 671.7 이후 신라는 백제의 옛 땅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해당 지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편입했으며,
- 671.7 요동과
한반도로 진군한 당군은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 세력을 진압하고 평양에
방어진지를 구축함.
▶ 이후 신라와 당은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공방전을 이어 갔음.
□ 석문 전투와 칠중성 전투 패배
▶ 672 신라는
석문(황해도 서흥군)에서 당군과 대치하던 중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고,
▶ 이후 전국적인 축성으로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음.
▶ 674
전선이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되자,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여
▶ 675
칠중성 전투(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서 신라에 승리를 거두고, 매소성
일대(경기도 북부로 추정)에 주둔하며 한강 유역 점령을 시도하였음.
□ 매소성 전투 승리
▶ 675.9 당은 한강
하구의 요충지인 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에 의해 저지됨.
▶ 675.9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막대한 군수와 전과를
거두어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 매소성은 넓은 평야와 주요 교통로를 가진 전략적
요충지로 한강 이북 방어선의 핵심 거점
▶ 676.2 당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김.
▶ 676.윤3
이후 당은 서쪽 토번의 침공으로 내지가 위협받자, 신라 전선을 포기하고
토번 전선에 집중하는 선택을 함.
↘ 토번은 7~9세기에 존속한 티베트 왕국으로,
실크로드 요충지를 압박하며 당과 대립함
□ 기벌포 전투
▶ 676.11 이후 당은
전세 만회와 철수를 위해 기벌포(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에서 신라군과
교전하였으나,
▶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퇴하였고 이에 따라 서해 제해권과 한반도
내 군사적 거점을 잃게 됨.
■ 이후
▶ 신라는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대부분 잃었지만, 한반도 남부 지배를
확정하였고
▶ 이어 신라는 안승의 보덕국을 멸망시키며
고구려 부흥 운동을 마무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