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신라 27대 선덕여왕

덕만, 선덕왕, 26대 진평왕의 맏딸, 29대 진덕여왕의 사촌 언니
632부터 647년까지 약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음.

선덕여왕은 즉위 후 민생 구휼과 불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정국을 수습하고 행정 기반을 정비했음.
대야성 함락 등으로 신라는 큰 위기에 처했으나,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군사 대응으로 당과의 협력 발판을 마련함.
이후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더 강화됨.

선덕여왕

■ 즉위 이전
 ▶ 6C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 지역을 확보했지만,
 ▶ 그 뒤로 신라는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공에 직면했음.

 ▶ 631 진평왕 말기에 일어난 칠숙·석품의 난은 선덕여왕이 후계자로 지명된 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 재위 기간
□ 정국을 수습
 ▶ 632년 1월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선덕여왕이 즉위함. 
 ↘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골 남성이 끊기자, 성골 신분의 덕만이 계승자로 선택됨.
 ▶ 선덕여왕은 을제에게 국정 전반을 맡기고, 자신은 조세 감면과 구휼 등 민생 안정 조치를 통해 즉위 초기의 흔들린 정국을 차근차근 정비해 나갔음.

 ▶ 634 분황사( 경주 분황사지 , 사적 제548호)와
 ▶ 635 영묘사를 세우고 백좌강회를 여는 등 불교적 권위를 활용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함.

 ▶ 636 선덕여왕은 궁궐 남서쪽 옥문곡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미리 알아차리고 알천 등을 보내 격퇴하게 했음.

 ▶ 639 하슬라주(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북소경을 두어 지방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 귀족 자제들을 당의 국자감에 유학 보내 유교 문화를 익히게 하고자 함.

□ 대야성 전투 패배
 ▶ 641 백제 의자왕 즉위 후 백제의 공세가 더 거세지면서
 ▶ 642년 7~8월 대야성을 포함한 서쪽 40여 성이 함락되었고, 신라는 가야 지역의 지배권을 잃음. 
 ↘ 대야성 전투의 패배는 김춘추가 당과의 연합을 결심하는 직접 계기가 됨.
 ▶ 642.8 이어 백제와 고구려는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까지 빼앗아 신라와 당의 연결로를 끊으려 했음.

 ▶ 642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러 갔으나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쪽 지역의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김춘추가 이를 거부하면서 억류됨.
 ▶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압박하자 그제야 풀려났음.

 ▶ 643.9 이에 신라는 당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 자장과 황룡사 9층 목탑
 - 643 자장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귀국한 뒤,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승단을 이끎.
 - 자장은 당에서 들은 신인의 조언을 전해 황룡사 9층탑 건립을 건의했고, 645년 목탑이 완공되자 황룡사 주지로 취임함. 
 ↘ 9층 목탑은 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불교의 힘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바람이 담김.

□ 군사적 대응
 ▶ 신라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의 7성을 되찾았고,
 ▶ 645 김유신은 이어지는 백제의 공격을 잇달아 막아냈음.
 ▶ 645.5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자 신라는 군사 3만을 보내 이에 협력했지만, 그 사이 서쪽의 7성을 다시 백제에 빼앗김.

□ 비담의 난
 ▶ 647.1 비담과 염종이 여왕의 통치 능력을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의 전략으로 반란을 진압했음. 
 ▶ 이후 여왕에 반대하던 귀족 세력은 약화되고, 김춘추·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더욱 강화됨.

■ 사후
 ▶ 647 비담의 난 중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이 즉위함.

 ▶ 1969.8  경주 선덕여왕릉 이 사적 제182호로 지정됨.

선덕여왕


# 참고 자료
[선덕여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