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위 이전
▶ 6C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 지역을 확보했지만,
▶ 그 뒤로 신라는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공에 직면했음.
▶ 631
진평왕 말기에 일어난
칠숙·석품의 난은 선덕여왕이 후계자로 지명된 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 재위 기간
□ 정국을 수습
▶ 632년 1월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선덕여왕이 즉위함.
↘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골 남성이 끊기자, 성골
신분의 덕만이 계승자로 선택됨.
▶ 선덕여왕은 을제에게 국정 전반을 맡기고, 자신은
조세 감면과 구휼 등 민생 안정 조치를 통해 즉위 초기의 흔들린 정국을
차근차근 정비해 나갔음.
▶ 634
분황사( 경주 분황사지 , 사적 제548호)와
▶ 635
영묘사를 세우고 백좌강회를 여는 등 불교적 권위를 활용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함.
▶ 636
선덕여왕은 궁궐 남서쪽 옥문곡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미리 알아차리고
알천 등을 보내 격퇴하게 했음.
▶ 639
하슬라주(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북소경을 두어 지방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 귀족 자제들을 당의 국자감에 유학
보내 유교 문화를 익히게 하고자 함.
□ 대야성 전투 패배
▶ 641
백제 의자왕 즉위 후
백제의 공세가 더 거세지면서
▶ 642년 7~8월 대야성을
포함한 서쪽 40여 성이 함락되었고, 신라는 가야 지역의 지배권을
잃음.
↘ 대야성 전투의 패배는 김춘추가 당과의 연합을
결심하는 직접 계기가 됨.
▶ 642.8 이어
백제와 고구려는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까지 빼앗아 신라와 당의
연결로를 끊으려 했음.
▶ 642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러 갔으나 연개소문은 죽령 서북쪽
지역의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김춘추가 이를 거부하면서 억류됨.
▶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압박하자 그제야 풀려났음.
▶ 643.9
이에 신라는 당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 자장과 황룡사 9층 목탑
- 643 자장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귀국한 뒤,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승단을 이끎.
- 자장은 당에서 들은 신인의 조언을 전해 황룡사 9층탑 건립을
건의했고, 645년 목탑이 완공되자 황룡사 주지로 취임함.
↘ 9층 목탑은 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불교의 힘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바람이 담김.
□ 군사적 대응
▶ 신라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의 7성을
되찾았고,
▶ 645
김유신은 이어지는 백제의 공격을 잇달아 막아냈음.
▶ 645.5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시작하자 신라는 군사 3만을 보내 이에
협력했지만, 그 사이 서쪽의 7성을 다시 백제에 빼앗김.
□ 비담의 난
▶ 647.1 비담과 염종이 여왕의 통치 능력을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의 전략으로 반란을 진압했음.
▶ 이후 여왕에 반대하던 귀족 세력은 약화되고,
김춘추·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더욱 강화됨.
■ 사후
▶ 647
비담의 난 중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이
즉위함.
▶ 1969.8
경주 선덕여왕릉 이
사적 제182호로 지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