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대야성 전투
▶ 642.8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하는
과정에서 김춘추의 딸이 목숨을 잃자,
▶ 642 말
김춘추는 복수를 위해 고구려와의 동맹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음.
□ 나당 연합
▶ 이후
고구려 정복을
시도하던 당과 백제의 붕괴를 바라던 신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 648
김춘추는 당에 건너가 백제 정벌을 요청했고, 당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나당
군사 동맹이 성립되었음.
- 더불어 두 나라는 동맹을 맺으며 당이 고구려를, 신라는 백제를
차지하기로 상호 이해관계를 정립함.
□ 백제 멸망
▶ 660 나당
연합군은 1차 목표였던 백제를 향해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고,
▶ 내부
분열로 약화된 백제는 신라군과 당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
▶ 660.8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항복하며
백제는 멸망하였고,
- 당은 약속과 달리 백제 영토에
5도독부를 설치하며 직접 지배를 시도함.
■ 백제 부흥 운동
□ 백제 유민들의 봉기
- 사료에 따르면 “신라군이 백제인을 모두 죽이려
한다”라는 소문이 기존의 원한과 결합하면서, 백제 유민들의 동시다발적
봉기를 촉발한 것으로 보임.
↘ 유민(遺民)은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남아 옛
국가에 대한 정체성과 충성을 유지하던 백성
- 임존성 (지금의 충남 예산, 사적 제90호)의 흑치상지와 주류성(지금의 충남
서천)의 복신(30대 무왕의
조카)·도침이 나당연합군에 맞섰음.
↘ 남장성·정헌성, 두시원악(지금의 충남 청양)의
정무, 구마노리성(지금의 충남 공주)의 여자진(여자신) 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음.
□ 백제 부흥군의 저항
▶ 660.8 당군은
백제 유민의 기세를 꺾기 위해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지배
기반을 약화시키려 의자왕과 왕족·신료·백성을 당으로 옮겼음.
▶ 이를
틈 타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주변 20여 성이 호응했으나,
신라 무열왕이 태자와 함께
출정해 가담한 성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사비성을 구원함.
□ 고구려와 왜의 참여
- 복신과 도침은 부흥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던 의자왕의 아들 풍의 귀국을 추진하며 왜의 군사
지원을 확보했고,
- 660.10
고구려는 신라의 칠중성(지금의 경기도 파주)을 공격함.
□ 공방전
▶ 661 초 백제
부흥군은 풍의 귀국을 기다리며 사비성을 포위했지만, 실패하여
임존성으로 퇴각함.
▶ 신라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자
백제 부흥군은 이를 막아내고 철수하던 신라군에 역습을 가해 큰 피해를
줬음.
▶ 이어 백제 부흥군은 웅진성에서 출격한 당군을
대파하였음.
▶ 신라와 당이 고구려 공략에
집중하는 사이, 백제 부흥군은 식량 보급로를 차단해 웅진성을
고립시키고 남쪽의 여러 성을 되찾으며 세력을 넓혀 갔음.
▶ 이에
당의 요청을 받은 신라 문무왕은 김유신과 품일을 보내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시키고 끊겼던 보급로를 복구함.
□ 백제 부흥군 지도층의 내분
▶ 왕자 풍이 귀국한 뒤, 복신은 도침을 제거하고 그의
군사를 흡수해 세력을 확장했음.
▶ 662.7
나당연합군은 이러한 내부 갈등을 기회로 삼아 공세를 더 강화함.
▶ 풍은 복신과의 권력 다툼 끝에 복신을 제거했으나, 백제
부흥군의 군세는 이미 크게 약화된 상태였음.
□ 주류성 함락
-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던 태자 융이 당의
지휘관으로 귀환하자, 임존성의 흑치상지는 이에 항복함.
▶ 663.8
나당 연합군은 백강과 육로로 군을 진격시켜 주류성을 수륙 양면에서
포위했고,
▶ 왜병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강 전투에서 패한 백제 부흥군은
결국 주류성을 지켜내지 못함.
- 이때, 지수신이 임존성에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흑치상지에게 패해 고구려로 도피함.
■ 이후
□ 당의 한반도 정책
▶ 당은 기존의 5도독부 체제를 정비해 웅진도독부만을
남기고 직접 통치하는 구조를 갖춤.
↘ 당은 백제 지역의 지배력을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부 영토는 신라가 차지함.
- 이어 백제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으며, 신라는 계림대도독부로 삼아 문무왕을 그
책임자로 세움.
▶ 이후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백제의 옛 영토를 모두 확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