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 대야성 전투
▶ 642 백제는
신라를 압박하며
대야성을 함락했고, 이
과정에서 김춘추는 대야성을 지키던 사위와 함께 자기 딸까지 잃음.
▶ 648
이후 김춘추는 직접 당으로 건너가 태종을 만나
군사 동맹을
성사시킴.
□ 신라의 체제 정비와 백제의 정치 혼란
▶ 654
신라 무열왕(김춘추)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 안정을 위해 왕족 중심의 권력 구조를 새롭게
정비해 정치·군사 체제를 안정시켰지만,
▶ 655 >
백제 의자왕은 재위 후반
기존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며 왕족 중심의 권력을 더 강화해, 백제는 내부 균형이 붕괴되고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음.
■ 백제 멸망
□ 신라와 당의 출병
▶ 659.4 삼국 통일
전쟁의 준비를 마친 무열왕은 백제 정벌을 위해 당에 원군을
요청했고,
▶ 660.3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해 13만의 당군을 파병했음.
▶ 신라와
당은 7월 10일 사비성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으며, 무열왕은 태자와
김유신에게 신라군 5만을 맡겨 백제로 출정하게 함.
▶ 신라·당
연합군의 출병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대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엇갈렸고,
▶ 유배 중이던 흥수의 백강·탄현 방어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이 연합군은 이미 두 요충지를 넘어섰음.
□ 황산벌 전투
▶ 7.9 계백은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네 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으나,
▶ 신라는 관창과 반굴의 희생으로 사기를 끌어 올려
백제군을 돌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격했음.
- 소정방과
김인문이 이끈 연합군도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며 사비성으로
향했음.
□ 사비성 함락
▶ 7.10 당군이
사비성 밖 30리(약 12㎞) 지점에 먼저 도착해 백제의 총력 공격을
격퇴하며 큰 승리를 거뒀고,
▶ 7.11
황산벌 전투로 지연된 신라군이 사비성에 도착함.
▶ 7.13 연합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피했고,
▶ 사비성에 남은 왕자 태가 방어를 맡았지만,
문사(태자 효의 아들)와 부여융(의자왕의 장남)이 당군에 투항하자
백성들의 항복이 잇따랐고 결국 사비성은 함락되었음.
□ 의자왕의 항복
▶ 660년 7월 18일 웅진성(현재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재기를 노리던 의자왕은
방어 책임자의 배신으로 결국 당에 항복함.
▶ 8월 2일
이후 사비성에서는 항복식과 연회가 열렸고, 의자왕은 연합군
지휘관들에게 술을 올림.
■ 이후
□ 백제 부흥 운동
▶ 660.8 백제 멸망
이후, 흑치상지와 복신 등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전개되었지만,
▶ 663.8
주류성이 함락되며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림.
▶ 이어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음.
▶ 668
이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 정벌을 추진함.
□ 백제 금동대향로
- 1993.12
부여 능산리 사지 (사적 제434호)에서
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가 발견되었는데, 연대 측정 결과 중심 연대가 660년경으로 나와
백제 멸망과 관련있을 거라 추측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