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백제 멸망


기원전 18부터 660년까지 약 700년 동안 존속함

의자왕 재위 후반, 백제는 내부 혼란이 심화된 상황에서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음.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연합군에게 포위되었고,
의자왕은 웅진으로 도피했으나 결국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함.

백제 멸망

■ 이전
□ 대야성 전투
 ▶ 642 백제는 신라를 압박하며 대야성을 함락했고, 이 과정에서 김춘추는 대야성을 지키던 사위와 함께 자기 딸까지 잃음.
 ▶ 648 이후 김춘추는 직접 당으로 건너가 태종을 만나 군사 동맹을 성사시킴.

□ 신라의 체제 정비와 백제의 정치 혼란
 ▶ 654 신라 무열왕(김춘추)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 안정을 위해 왕족 중심의 권력 구조를 새롭게 정비해 정치·군사 체제를 안정시켰지만,
 ▶ 655 > 백제 의자왕은 재위 후반 기존 정치 질서를 무너뜨리며 왕족 중심의 권력을 더 강화해, 백제는 내부 균형이 붕괴되고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음. 

■ 백제 멸망
□ 신라와 당의 출병
 ▶ 659.4 삼국 통일 전쟁의 준비를 마친 무열왕은 백제 정벌을 위해 당에 원군을 요청했고,
 ▶ 660.3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해 13만의 당군을 파병했음.
 ▶ 신라와 당은 7월 10일 사비성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으며, 무열왕은 태자와 김유신에게 신라군 5만을 맡겨 백제로 출정하게 함.

 ▶ 신라·당 연합군의 출병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대책을 논의했으나 의견이 엇갈렸고,
 ▶ 유배 중이던 흥수의 백강·탄현 방어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이 연합군은 이미 두 요충지를 넘어섰음.

□ 황산벌 전투
 ▶ 7.9 계백은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네 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했으나, 
 ▶ 신라는 관창과 반굴의 희생으로 사기를 끌어 올려 백제군을 돌파하고 사비성으로 진격했음.
 - 소정방과 김인문이 이끈 연합군도 기벌포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며 사비성으로 향했음.

□ 사비성 함락
 ▶ 7.10 당군이 사비성 밖 30리(약 12㎞) 지점에 먼저 도착해 백제의 총력 공격을 격퇴하며 큰 승리를 거뒀고,
 ▶ 7.11 황산벌 전투로 지연된 신라군이 사비성에 도착함.
 ▶ 7.13 연합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도피했고, 
 ▶ 사비성에 남은 왕자 태가 방어를 맡았지만, 문사(태자 효의 아들)와 부여융(의자왕의 장남)이 당군에 투항하자 백성들의 항복이 잇따랐고 결국 사비성은 함락되었음.

□ 의자왕의 항복
 ▶ 660년 7월 18일 웅진성(현재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재기를 노리던 의자왕은 방어 책임자의 배신으로 결국 당에 항복함. 
 ▶ 8월 2일 이후 사비성에서는 항복식과 연회가 열렸고, 의자왕은 연합군 지휘관들에게 술을 올림.

■ 이후
□ 백제 부흥 운동
 ▶ 660.8 백제 멸망 이후, 흑치상지와 복신 등을 중심으로 한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전개되었지만,
 ▶ 663.8 주류성이 함락되며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림.
 ▶ 이어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음.

 ▶ 668 이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 정벌을 추진함.

□ 백제 금동대향로
 - 1993.12  부여 능산리 사지 (사적 제434호)에서  금동대향로 (국보 제287호)가 발견되었는데, 연대 측정 결과 중심 연대가 660년경으로 나와 백제 멸망과 관련있을 거라 추측됨.

백제 멸망


# 참고 자료
중학교 역사2, 금성출판사 2023
중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의자왕]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