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 1972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남북한도 평화적 대화를 시도하며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함.
□ 국제 정세 변화
▶ 1979~ 소련은
친소 정권 유지 등을 이유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했으나, 장기전에
따른 국력 소모와 국제적 고립으로 큰 타격을 입었음.
▶ 1985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내세운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 때문에 동유럽
공산권에도 변화의 물결이 퍼졌음.
▶ 1989~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지며 공산
정권이 잇따라 붕괴하기 시작했음.
□ 남북 관계 개선
▶ 1988 노태우
대통령은 7.7 선언을 통해 북한을 민족 공동체로 인식하고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북방외교의 출발점이자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점이 됨.
▶ 1989.2
북한이 남북 간 정치·군사 회담을 제의하자, 남한은 이를 받아 포괄적
고위급 회담을 역제안하며 예비회담이 열렸음.
▶ 1989.9
이후 남한은 남북연합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였고,
▶ 이에 대응해 북한은 연방제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남북 군축과 외국군 철수, ‘두 개의 조선’ 반대
등을 포함한 ‘포괄적 평화방안’을 제시함.
↘ 북한은 1960년대부터 연방제 통일방안을 주장해
옴.
□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 1990.9~12 남북
고위급회담은 3차까지 이어졌고,
- 1990.10
이 사이 남한은 소련과 국교를 수립함.
▶ 이후 북한은
걸프전쟁 발발(1991.1)과 한미
팀스피릿 훈련을 이유로 회담 중단을 선언했지만,
↘ 한미 팀스피릿 훈련은 1976년부터 1993년까지
매년 2월에서 5월 한반도에서 시행되었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
▶ 1991.9 남북한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지지를 받아 결국 유엔에
동시 가입하게 됨.
□ 남북 고위급회담 재개
▶ 1991.10
중단되었던 남북회담은 평양에서 열린 4차 회담을 계기로
재개되었으며,
▶ 이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건설적이고 협조적인 태도를 유도하기 위해 남한의 핵 포기 선언(1991.11)과 미군 전술핵무기 철수(1991.12)
등을 포함한 조처를 했음.
■ 남북 기본합의서
▶ 1991.12 5차 회담에서 남북은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합의함.
- 1장(남북화해)에서 남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존중하고, 내정
간섭과 비방·도발을 금지하며, 평화 정착과 소통 강화를 위한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등에 합의함.
- 2장(남북불가침)에서 남북은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한 경계선을 인정하며, 군사공동위원회
구성과 직통전화 설치를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로 함.
- 3장(남북교류
및 협력)남북은 자원 공동개발, 이산가족 상봉, 철도·도로 연결 등
경제·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확대를 추진하기로 함.
- 4장(수정
및 발효) 합의서는 쌍방의 합의에 따라 수정할 수 있고, 서명 이후
효력을 갖는 절차를 규정함.
■ 이후
▶ 1992.2
6차 회담에서 수석대표들이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합의가 공식적으로
발효됨.
▶ 1992.3~12
이후 정치·군사·교류 협력 등 각 분과위원회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지만,
실행 방안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 도출에는 이르지 못했음.
▶ 1992~1993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사찰에
착수하면서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짐.
▶ 1993.3 이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한반도는 안보
위기에 직면했고, 남북 간 화해 분위기는 급격히 약화되며 갈등이
재점화되었음.